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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9.01 중얼중얼
  2. 2009.08.31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들
  3. 2009.08.26 미륵사지 석탑의 복원은 왜 계속 늦춰지는 것일까? 2
  4. 2009.07.13 중얼중얼
  5. 2009.06.29 중얼중얼
  6. 2009.06.15 화이트메인 언니
  7. 2009.06.14 중얼중얼
  8. 2009.06.11 100˚C - 뜨거운기억, 6월민주항쟁
  9. 2009.06.02 중얼중얼 2
  10. 2009.05.30 역사는 반복된다.

중얼중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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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타까운 비행, 청연(靑燕)


이쁘장하기만한 그저그런 여배우 장진영을 다시 보게 된 계기는 영화 '소름'을 본 후이다.

소리만으로 사람을 긴장시켰던 그 공포영화를 더욱 빛나게 해주었던 것은

바로 김명민과 장진영의 연기였다.

그 후, 오버 더 레인보우, 국화꽃향기, 싱글즈를 보면서 자연스레 그녀의 팬이 되었던 것 같다.

영화 '청연'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그 당시 그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이들의 모습을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친일영화라는 논란에 휘말려 네티즌의 폭격(저글링 개떼라 부르고 싶다)을 받으며 

그 멋진 비행장면도, 장진영의 주연으로서의 재발견도, 그렇게 날아가버렸다.


"결국 이렇게 혼자 또 떠나는구나"라는 청연에서의 마지막 독백처럼

배우 장진영은 결국 그렇게 혼자 가버렸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


고 김대중 전대통령님께서 일기장에 적으셨던 말.

"역사는 수레바퀴처럼 돌아가며 반복되지만, 그 과정에서 조금씩 발전한다."

사회, 역사, 정치에 대해 알기 시작했던 13년 전부터의 내 신념과 같았던 말을 DJ의 일기장에서 보고

잠시 울컥했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요즘 우리 사회를 바라보고 있자면, 자꾸만

"역사는 그저 반복될 뿐 전혀 발전하지 않는다"

라고 생각하게 된다.



3. 결혼


누구는 내가 상황이 안되서 말만 그렇게 할 뿐, 실제로는 결혼을 하고 싶어한다고 하기도 하지만,

대학시절 육아에 시달리던 사촌형의 집에서 3 년간 하숙한 경험,

많은 위기 끝에 결국 결혼했지만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는 친구나 선배, 결혼에 목매다는 일부 주위 여자들을 보면서

거기에 원래부터 개인주의적인 성격까지 결합되면서 자연스레 결혼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된 것 같다.

'언젠가는 하겠지만 굳이 꼭 하고 싶지는 않다' 뭐 이정도?

그리고 그런 생각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런데,

'이 자식보다는 빨리 하겠지'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친구의 결혼 소식을 들으니

무언가 씁쓸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직장을 잡아 인생을 살아가는 대학시절 친구 녀석들과 달리 

난 여전히 90년대 중후반 그 시절에 머물러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이래저래 씁쓸한 날이다.





And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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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모름)



중국집 군만두 서비스 - 얼마부터 시작인가?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숙제 - 엄마가 좋은가 아빠가 좋은가?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숨겨진 진실 - 키높이 깔창 허용해야 하는가? 

셜록 홈즈도 속아버린 완벽한 트릭 - "오빠 믿지?" 과연 믿어야하는가?

불특정 다수를 노린 테러 - 음식점 배달 "방금 출발했어요" 과연 믿어야하는가? 

당신이 간과한 혈육 - 식당이모 과연 가족으로 인정해야하는가? 

솔로몬도 두 손을 든 미스테리 - 영화관 의자의 팔걸이 과연 어느 쪽이 내 것인가? 

인류가 낳은 재앙 - 노래방 우선예약 권리인가 범죄인가? 

금녀의 벽을 넘는 유일한 존재 - 청소 아줌마의 남자화장실 출입 특권인가 업무인가? 

제 13차 교육과정의 일등공신 - 까다로운 변선생 선생으로 인정해야하는가? 

신용을 잃어버린 이 시대의 자화상 - "야 언제 밥 한번 먹자" 과연 언제 먹을 것인가? 

인류의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 로맨스 - 114안내원의 안내멘트 "사랑합니다 고객님" 진정 날 사랑하는 것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를 감동시킨 바로 그 문구!!!



11차원 우주만큼이나 난해한 그 누구도 풀수없는 질문 - 오빠, 정말 내가 왜 화났는지 모르겠어?


응, 모르겠어..ㅜ.ㅜ;;;;

And

미륵사지 석탑의 복원은 왜 계속 늦춰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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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륵사지 석탑

  

 

그림 1. 해체 전의 미륵사지 석탑

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

(http://www.nricp.go.kr/kr/data/mkr/find/view_home_img.jsp?img_path=http://221.145.178.204/nrichdata/common/culture_img/1_8.jpg&img_caption=3차원 스캐너를 이용한 석조문화재 보존)

 

 

미륵사지 석탑은 백제 무왕 때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는 현존 최고최대(最古最大)석탑으로

백제 목탑을 추측해 볼 수 있는 목탑형 석탑이다.

 


백제의 무왕과 그의 아들 의자왕으로 이어지는 시기는 백제의 마지막 전성기로 볼 수 있는 시기이다
.

(의자왕은 삼천궁녀처럼 방탕과 사치의 대명사로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신라에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하여 신라의 40 여성을 함락하여 신라에 두려움을 준 군주이다.

의자왕에 대한 이야기는 무궁무진하고 또 재미있지만,

글의 주제를 벗어나 샛길로 빠질 수 있으니 다음에 기회가 될 때...)

 


미륵사의 창건배경에 대해서 말하려면 무왕이 백제의 왕이 되기 전후 시기의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
.

(MBC 드라마 '선덕여왕'의 시기가 바로 이 시기)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 시기에 한성을 빼앗기고 수도를 지금의 공주인 웅진으로 천도하였다
.

이후 백제는 여러 차례 위기를 극복한 후 성왕 시기에 다시 중흥의 기틀을 마련한다.

성왕은 신라와 그 유명한 나제동맹을 맺고 빼앗겼던 한강유역의 6군을 회복할 뻔하였다.

이때의 전투에서 주력군은 백제군이었고, 신라군은 보조군대에 지나지 않았으니,

백제로서는 당연히 옛 땅을 회복할 것이라 생각했겠지만,

신라 진평왕(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이순재 씨가 분한 진평대제)의 배신으로

도리어 이 땅을 신라에게 빼앗기고 만다.

이에 분노한 성왕이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그는 관산성(현재의 옥천)에서 전사하고 만다.

이후부터 백제의 멸망시기까지 백제와 신라는 전쟁상태에 놓이게 된다.

성왕의 전사이후 백제는 귀족들의 발호로 인해 심각한 위기에 빠졌고,

법왕과 혜왕은 즉위한 지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귀족들에 의해 살해된다.

 


이러한 혼란의 시기를 수습하고 백제의 마지막 중흥기를 이룬 군주가 서동요로 유명한 무왕이다
.

무왕은 위기극복과 왕권강화를 통해 체제정비를 추구한 동시에,

신라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는데(재위 42년간 12차례나 신라를 공격),

동양최대의 사찰인 미륵사는 이런 목적을 위해 건설되었다고 볼 수 있다.

(미륵사가 위치한 전북 익산은 태어나자마자 쫓겨난 무왕에게 도움을 준 세력의 근거지이자,

신라와의 격전지에 매우 가까이 위치한 지역이기도 하다.)

 


미륵사는 이와 같은 역사적인 가치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 보았을 때
,

미륵사지 석탑은 목탑에서 석탑으로의 양식 이행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 문화재이므로 매우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림 2. 미륵사지 석탑 추정도

 

 

이런 미륵사지 석탑은 지진, 지반의 부동침하 등의 외부요인으로 인해

일부가 붕괴되어(되었다고 추정되어) 몇 번의 개보수 과정을 거쳤는데(그림 1 참조),

1998년 구조안전진단결과 추가 붕괴의 위험성이 제기되어

붕괴원인조사 및 복원을 위하여 2001년 해체보수 작업에 착수하여 현재까지 해체가 진행 중에 있다.

본래 미륵사지 석탑의 복원은 2007년 완료될 예정이었지만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90120019008)

해체 과정에서 사리장엄구의 발견, 복원작업의 어려움 등의 이런저런 이유로

2009년까지 미뤄졌다가 또 다시 2014년으로 미뤄졌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미륵사지 석탑 정비계획을 위한 구조안정성 평가연구’에 관련된 연구용역에

아주 잠깐(3개월 정도?) 참여하여

자문회의도 두어 번 참석해보고 미륵사지 석탑의 복원 현장을 몇 번 찾아가 본 적이 있다.


 

그래서 이 글은 구조공학적 및 암석역학적으로 보았을 때

미륵사지 석탑의 복원이 왜 계속 미뤄지는 지에 대한 내용을 최대한 쉽게 다뤄보려고 한다.

(글 쓰는 능력이 떨어져서 정말 쉬울지는 미지수..;;)

 


뭐, 이런 주제의 글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지 의심스럽긴 하지만,

남들은 관심을 갖지 않는 마이너한 블로그를 지향하니 만큼..;;

 

 

 

 

2. 미륵사지 석탑의 구조

 

 

구조적으로 봤을 때, 미륵사지 석탑은 심주석, 적심석, 치장석 등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그림 3. 미륵사지 석탑의 구조의 추정도

 

 

심주석은 탑 안쪽 중심부에서 기둥과 같은 역할은 하는 돌이다.

심주석은 탑 전체의 하중을 지탱하여 탑의 기단부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가로, 세로는 각각 1m 정도, 그리고 높이는 얼마더라?;;

 

치장석(그림 4)은 탑의 외부에서 보게 되는 면의 돌로서,

지붕모양의 옥개석, 상옥개받침, 하옥개받침, 면석, 하방석으로 구성된다.

미륵사지 석탑의 한 층은 위 5개의 돌들이 석탑의 4면을 둘러싸면서 이뤄진다.

 

 

 

그림 4. 1개 층의 치장석 구성

 

 

적심석은 치장석과 심주석사이의 공간에 채워넣는 돌로써, 크기와 모양이 매우 불규칙하다(그림 5 참조).

불규칙한 적심석사이의 공간은 모래와 진흙 등으로 매꿔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석탑 건설 초기에는 적심석 역시 탑의 하중을 기단부로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 바람 등으로 인해 적심석 사이 공간이 비워진 후에는

탑의 하중을 심주석으로 전달하는 역할만을(또는 그 역할조차도 제대로 수행 못)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로인해 외부 치장석에서 균열 및 파괴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적심석이 단순히 심주석에 하중을 전달하는 역할만을 했는가, 아니면 하중을 지탱하는 역할도 병행했는가는 전문가들 사이에도 의견이 분분하다.)

 

 

간단하게 말하면 다음과 같다.

 


             심주석: 탑의 기둥, 탑 전체의 하중을 지탱하여 기단부로 전달

             치장석: 탑 겉모습

             적심석: 탑의 하중을 심주석에 전달

 

 

 

그림 5. 2층까지 해체되고 1층만이 남았을 때의 미륵사지석탑

 

 

 

 

 

3. 미륵사지 석탑의 붕괴 원인

 

 

미륵사지 석탑은 조적식 구조물이다.

조적식 구조물이란 돌 ·벽돌 ·콘크리트블록 등을 쌓아 올린 건축구조로서,

내구성은 우수하지만 지진 등에 의한 수평방향의 외력(外力)에 대하여 약한 단점을 가지고 있다.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이러한 조적식 구조물에 대한 체계적인 해석 및 보수, 보강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는 편인데,

미륵사지 석탑에 관한 대부분의 구조적 연구 역시,

건립시기와 양식 등의 심미적 관점의 건축사 연구가 주를 이루고 있다.

 

현재 미륵사지 석탑에 대한 구조공학적 관점의 연구는

미륵사지석탑의 붕괴원인을 분석하는 단계까지 진행되어있다.

기존 연구결과의 추론과 검증에 따르면 붕괴원인은

 


지반의 침하로 인한 적층구조물의 안정성의 저하,

낙뢰로 인한 상부 구조물의 탈락,

지진 및 바람하중으로 인한 과도한 횡변위



등으로 추정하고 있다.

 

 

낙뢰로 인한 상부 구조의 탈락과 지진 등이 사료에 언급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철탑도 아닌 석탑이 낙뢰로 인해 (일부) 붕괴되었다는 건 개인적으로 믿기 어렵고,

(, 그림 2에서 보면 상륜부가 금속으로 되어있으니 가능할지도..;;)

지진이 거의 없는 국내 특성상 지진이 석탑 붕괴의 일부 또는 전체 원인이었다는 것 역시 믿기 어렵다.

 

 

개인적으로는

 

1. 지반침하로 인한 석탑의 안정성 저하

(미륵사 서탑 초석 최대 16㎝ 기울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8041805461&code=960201)

 

2. 적심석 사이 진흙과 모래의 유실로 인한 치장석 및 적심석의 하중 증가와 치장석의 파괴

 

이 두 가지가 미륵사지 석탑 붕괴의 주된 원인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실제로 해체되기 전후의 치장석과 적심석을 살펴보면 곳곳에 균열이 발생한 것이 보인다.(그림 4, 6, 7, 8)

 

 

 

그림 6. 파괴된 치장석 1

 

 

그림 7. 파괴된 치장석 2

  

 

그림 8. 파괴된 적심석

 

 

 

 

 

4. 일제 강점기의 미륵사지 석탑 붕괴 방지 대책은?

 

 

중고등학교 때 국사시간에 배웠듯

붕괴를 막기 위해 또는 힘을 과시하기 위해

일제 강점기에 콘크리트를 발라 놓았다고들 한다.

(고등학교 졸업한 지 십 수 년이 지난지라 요즘에 어떻게 배우는지는 잘 모른다..;;)

 

개인적으로는 그 당시의 붕괴 방지 대책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본다.

 

일단 그림 1을 다시 보자.

 

 

그림 1. 해체 전의 미륵사지 석탑

 

 

그림 1을 보면

석탑 붕괴를 방지하기 위해 기단 및 1층 부분에 석축을 쌓은 조선시대의 보수,

그리고 콘크리트로 붕괴 방지를 한 일제 강점기의 보수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그냥 그 시대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붕괴 방지를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음 그림을 보면 이를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림 9. 치장석의 입체도(북서측)

 

 

그림 9 2층 이상의 심주석과 적심석,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 시공한 콘크리트를 제외하고

해체 직전의 1층과 기단부, 조선시대에 축조한 석축, 그리고 6층까지의 치장석만을 도시한 그림으로

치장석의 하중을 지탱하는 돌들이 없을 경우에

미륵사지 석탑이 구조적으로 얼마나 불안정한 지를 확연히 보여준다.


 

, 바람으로 인한 풍화, 적심석간의 모래 및 점토 유실, 석탑 상부 붕괴 등으로로 인해 

적심석과 심주석이 일제 강점기 전에 이미 그 역할을 상당 부분 상실했다는 점과


앞서 그림 6 7에서 본 것과 같이 치장석 자체에도 상당한 균열이 발생하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림 9와 같이 치장석이 기울어진 상태의 미륵사지 석탑이 붕괴직전이었다는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당시 석탑의 붕괴를 막을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콘크리트였다는 점 역시 쉽게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콘크리트를 이용한 붕괴 방지가 콘크리트와 접촉한 석재 부위의 부식을 가속시켰다는 비난은 피할 수 없다.


 

흔히 붕괴 방지를 위하여 석탑의 뒷부분에만 콘크리트를 시공하였다고 생각하지만아래 그림과 같이,

외부 치장석 간의 접촉 부분에서 유실된 석재 부분과 치장석 자체의 균열부분에도 콘크리트가 시공되어

이 부분에서도 부식이 촉진된바 있다.

또한 석탑 해체 후에 이 부분의 콘크리트를 제거하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들어간 것으로 안다.


 

 

그림 10. 콘크리트를 통한 일제의 치장석의 보수

 

 

하지만,



‘저 시대에 돌, 모래, 진흙의 구시대적인 재료와 콘크리트를 제외하고

석탑의 붕괴 방지를 위한 재료가 과연 무엇이 또 있었는가?


‘그러면 붕괴 직전인 석탑을 과연 그냥 두었어야 할 것인가?



에 대해 잠시만 생각해본다면,

일제의 석탑 붕괴 방지 대책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조금은 가혹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엔 돌로 막았고, 일제시대엔 콘크리트로 막았다.

‘그나마 걔네들 덕분에 석탑의 원형에 대해 조금이나마 더 가깝게 알 수 있었다.

 


뭐 이정도로 생각해 줄 수 있지 않을까
?

 

 

, 이 부분은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고,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다.

 

 

 

 

5. 미륵사지 석탑의 복원은 왜 계속 늦어지는가?

 

 

미륵사지 석탑의 복원 계획이 2007, 2009, 그리고 2014년으로 왜 계속 미뤄지는가는

미륵사지 석탑 중 동탑의 복원 형태와 이미 설명한 내용을 조합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림 11에서처럼 현재 복원중인 미륵사지 석탑은 미륵사의 서쪽(정면에서 좌측)에 있는 탑이고

동탑은 탑 부지 주변에는 탑 부재들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는데,

서탑을 통해 그 원형을 추정하여 1993년에 복원되었다(그림 12).

 

 

 

그림 11. 미륵사 추정도

(출처: 미륵사지유물전시관 홈페이지 http://www.mireuksaji.org)

 

 

그림 12. 1993년 복원된 미륵사지 동탑

 

 

미륵사지 동탑은 극히 일부분의 부재를 재사용 한 것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부재는 현대식으로 가공하여 복원되었는데,


이때문에 '백제 석탑의 고풍스러움과 운치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고 하여

유홍준 문화재청장으로부터 ‘최악의 문화재 복원사례’라고 개탄을 받는 등

(http://www.segye.com/Articles/News/Culture/Article.asp?aid=20071002002511&ctg1=12&ctg2=00&subctg1=12&subctg2=00&cid=0101051200000&dataid=200710020856000004)

 

‘실패한 문화재 복원사례가 아닌가’하는 논란이 일었었다.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php?bid=2536290&menu=dview&dencrt=zaRFGb2sNxbUXl0VbTY4NENaS2R3UHVsMzM4RjdweGJseldRU0hjUHNHU3RRSks3SVUwZGRLTnJOd1JaYnhjYw==&query=%B9%CC%B8%A4%BB%E7%C1%F6+%B5%BF%C5%BE+%BA%B9%BF%F8&term=#middle_tab)

 

 

서탑의 복원이 늦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현재 미륵사지 석탑의 복원은 본래 남아있던 6층까지만 복원될 계획이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tvh&oid=052&aid=0000210360)

 

6층까지 만의 복원에도 여러 계획안이 있는데,

크게 보면 그림 13과 같은 1안과 2안으로 나눌 수 있다.

 

 

 

1                                                                                 2

그림 13. 미륵사지 석탑의 복원안

 



1
안의 방법은 탑의 뒷부분에 현대적인 부재를 사용하여야 하기 때문에(붉은 타원 부분, 북서방향),

고풍스런 백제의 멋을 살리지 못했다는 동탑에 대한 비판을 그대로 적용 받을 것이기에 가급적 배제해야한다.

 


따라서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복원을 하려면 2안과 같은 형태가 최선의 대책일 것이다.

 

 

하지만 복원과정에서,

 


1. 앞서 그림에서 보았듯 치장석 자체도 파괴되거나 균열이 발생하였다는 점,

2. 현재의 적심석(황색 부분)은 표면이 상당부분 풍화되고 상당수는 균열이 발생하여 사실상 사용할 수 없다는 점,

3. 적심석의 형태가 불규칙하여 적심석 사이의 공간이 빈 공간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점

4. 2안과 같은 형태의 복원은 구조적인 불안정성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점


 

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위와 같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1.
파괴되었거나 균열이 발생한 치장석과 적심석은 석재용 접착제를 사용하여 접착하고,

2. (모래와 진흙은 비로 인해 유실될 수 있으므로)

   적심석 사이의 빈공간은 일정강도 이상의 현대적 인공 충진재로 채워넣으며

3. 그래도 발생할 수 있는 구조적 불안정성을 해결하기 위해 일제의 콘크리트와 같은 인위적 구조물을 석탑 뒷부분에 설치하여야 한다.

 

 

일단 3번의 방법은 우리가 일제에게 가했던 비판과 같은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1, 2번의 방법 역시 탑의 내외형을 보기 흉하게 만들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어떤 방법을 적용하든 현대적 인공 부재 또는 충진재의 사용은 불가피하기 때문에

복원된 동탑이 받은 비판을 또 다시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문화재청은



구조진단 결과 붕괴위험성이 예측되어 어쩔 수 없이 해체하였는데,

복원하려고 하니 ‘최악의 문화재 복원 사례’라는 동탑이 받았던 비판을 면할 수가 없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면초가, 진퇴양난... 뭐 이런게지...)

 


그나마 이런 비판을 최소화하려면
, 복원 책임자가,

 


1. 역사학과 고고학 전문가의 조언들 받고,

2. 건축구조공학 전문가의 해석을 통한 조언을 받아 구조적 안정성을 담보하여야 하며,

3. 충진재, 접착제와 관련된 부분은 재료공학자의 실험을 통한 조언을 받아 사용하고,

4. 치장석, 적심석, 심주석 등 석재 자체의 파괴 등과 관련해서는 암석역학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야하며,

5. 지반침하와 관련되어서는 지반공학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야한다.

 


그리고 이 모든 면을 고려하여 모든 전문가들이 수긍할 수 있는 최적의 복원을 해야한다
.

 

결국 복원 책임자는 모든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어야하는 아인슈타인 이상의 천재가 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자문회의에 참석해보면 각 분야 전문가 사이에도 의견이 분분하여

매 자문회의는 각 전문가가 자기 얘기만 하는 중구난방이 되기 일쑤다.



구조해석에 참여한 석박사 이상의 선후배들과 얘기한 결과는,

원형그대로의 복원은 ‘불가능’이었다.


 

이런 내우외환의 문제에 봉착한 문화재청이 과연 어떤 혜안을 제시할 것인지 기대된다.

 

 

 

 

And

중얼중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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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난 말만 너무 많다.
And

중얼중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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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믿음


사람은 보고싶은 것만 보고 믿고싶은 것만 믿는다.

- <생각의 오류>



보고싶은 것만 보려하고, 믿고싶은 것만 믿으려하는 것이겠지.

그것이 거짓인 줄 모르는 것이 아니라

거짓을 진실이라 믿음으로써, 아니면 그것을 애써 아니라고 부정함으로써

그동안 자신이 쌓아왔던 신뢰가 송두리째 무너져버리는 것을 막으려고 말이다.




2. 길동군




친구가 새로 입양한 고양이 길동군.


원래 주인분들에게서 데려오려 같이 갔는데,

아마도 나우가 없었으면 내가 데려오겠다고 했을지도...



축구보는 길동이..
백치미가 매력인 나우에게는 없는 영특함!


이건 변기 살피는 길동이..
역시 나우에게는 없는 저 호기심!




잠시 부러웠지만, 나는 그래도 백치미짱 방나우씨가 세상에서 제일 세번째로 좋다지.ㅋㅋㅋㅋ
이번 주말엔 나우와 함께 산책이나 가야겠다.




And

화이트메인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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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시대가 컴백한다는 기사의 사진을 보니 갑자기 WOW의 화이트메인 언니가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접었던 와우에 다시 접속하여 언니를 보러 수도원으로 고고씽~




확팩이 두 번이나 나와 이젠 잊혀진 존재가 되었지만, 클베·오베때 시작한 와우저에겐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있는 

바로 이 언니!!!


소시의 저 컨셉(특히 식하)에서 화이트메인 언니를 떠올린건 나 뿐인가...?-_-;




And

중얼중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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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의 실패를 곱씹으며 이번엔 일희일비 하지 않고 어떤 기대도 하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아끼려 노력하지만,

그게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

나도 모르게 조금씩 기대하게 되고  비교하게 되고 확인하려하고 작은 일에 서운해 하고...

그래도...이러다보면 언젠가는 욕심갖지 않고 무언가를 원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아껴주고 사랑해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걸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뭐, 지금도 충분히 행복하지만...


And

100˚C - 뜨거운기억, 6월민주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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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10일...

시청에 있지 않고 후배들과 술이나 퍼먹은 것이 부끄러워

6월항쟁에 관한 만화 한 권을 소개하려 한다.



100˚C - 뜨거운기억, 6월민주항쟁 (최규석 님)
만화전편보기: http://610.or.kr/museum/bbs/sub03e_000.html
최규석 님 홈페이지: http://mokwa.net/



87년 봄...

최루탄 냄새에 짜증내며 청바지에 청자켓을 입은 백골단을 멋지다고 동경하던 멋모르던 초등학교 5학년 시절,

강원대학교 정문앞 길거리 벽에 빼곡히 붙혀진 박종철 열사의 사진들과 글을 보며 부들부들 떨었던 기억이 있다.

땡전 뉴스를 보며 전두환과 노태우가 좋은 사람인 줄 알던 그 시절,

박종철 열사에 관한 사진과 글은 크나큰 충격이었다.



박종철 열사

(출처: 위키피디아 http://ko.wikipedia.org/wiki/박종철)
박종철(朴鐘哲, 1964년 4월 1일 ~ 1987년 1월 14일, 부산광역시 출생)은 대한민국의 민주운동가이다.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회장이던 그는 제5공화국 말기에 공안당국에 붙잡혀 물고문을 받다가 사망했다. 당시 이 사실을 은폐하려던 군사정권은 6월 항쟁으로 촉발되어 시민들의 대대적인 저항에 부딪혔고, 결국 6·29 선언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공안 당국은 박종철에게 박종철과 함께 학생운동을 하던 선배 박종운의 소재를 물었으나, 박종철은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경찰은 물고문을 하여 끝내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당시 박종철이 물고문을 받다가 숨지자 경찰은 의사를 불러왔고, 그 의사는 기자들에게 사건현장에 물이 흥건했다고 이야기했다. 물고문 사실을 숨길 수 없게 된 경찰은 서둘러 조한경 등 2명이 박종철군을 물고문하여 살해했다고 이 사건에 관하여 축소 은폐 보도를 하였다. 사건 조사결과를 발표하던 치안본부장 강민창은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습니다”라는 설득력 없는 해명으로 고문은 전혀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 말은 한동안 군사정권의 비도덕성을 조롱하는 유행어로 널리 사용되었다. 사건 수습을 위해 내무부 장관에 임명된 정호용은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리느냐”며 고문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했는데, 그는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특전사령관이었기 때문에 이 말 역시 마찬가지로 한동안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한편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과 안상수 검사 등이 진상을 규명하기 위하여 노력한 결과 박종철이 물고문에 의해 사망한 것이 밝혀졌다. 1987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도미사 도중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음을 폭로하였다. 대공경찰의 대부라는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의 주도 아래 모두 5명이 가담한 고문치사사건을 단 2명만이 고문에 가담한 것으로 꾸미고, 총대를 멘 2명에게는 거액의 돈을 주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1]
박종철씨 고문치사사건을 계기로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대한 성공회 서울교구,주임사제:이한우 바우로 신부)에서 6월 항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6월 항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6월 항쟁).
박종철은 2001년 2월 26일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명예졸업장을 받았으며, 유족과 당시 학생운동 동지들은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 가묘를 만들어 그를 기리고 있다.


굵은 글씨에 주목하자.


선배 박종운, 안상수 검사



다음은 100˚C에서 박종철 열사에 관한 부분...





1987년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진상규명 수사를 맡아

박처원 당시 치안감의 은폐음모를 언론에 공개한 뒤 사표를 제출하고 노동자 법률상담에 종사한 안상수 검사는,

독재자의 당 민정당의 후신 한나라당에서 원내대표를 하고 있다.


그리고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6월항쟁이라는 대한민국 역사의 불씨가 된 두 인물 박종철 열사와 박종운..

그렇다면 그 선배 박종운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인물과 사상 2004년 5월호에 실린 두 장의 사진으로 그 답을 대신한다.






아! 대한민국...ㅅㅂ


And

중얼중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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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두 권의 책
 


사랑은 누군가를 아프게 하는게 아니란다.
사랑은 아무도 다치게 하지 않아.
다만 사랑속에 끼워져 있는 사랑 아닌것들이 우리를 아프게 하지.
누군가 너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아프게 한다면 그건 결코 사랑이 아니란다.

엄마가 말했잖아 진정한 자존심은 자신에게 진실한 거야.
신기하게도 진심을 다한 사람은 상처받지 않아.
후회도 별로 없어.
더 줄 것이 없이 다 주어 버렸기 때문이지.
후회는 언제나 상대방이 아니라 자신을 속인 사람의 몫이란다.

- 공지영


어른이 된다는 건
상처받았다는 입장에서
상처 주었다는 입장으로 가는 것.
상처 준 걸 알았을 때
우리는 비로소 어른이 된다.

- 노희경



나만 상처받았다는 생각만을 하다가, 내가 상처 주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내가 한 행동들이 사랑이 아니라 사랑속에 끼워져있던 아집과 집착에 의해 행해졌단 걸 느낀 순간,

뒤늦게나마 그런 깨달음의 순간을 갖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2.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관계라고, 존재하지 않는 관계는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 연인이었던 녀석들과 편한 친구로 지내는 내 인간관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의심한다. "다른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냐?"

세상만사 100% 확실한 것은 없으니 단정적으로 "그런 것 없어!"라고 말하긴 그래서, 그냥 

"그런 것 아니라고, 네 생각과 기준과 다른 인간관계라고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인간관계는 아냐."라고 말하며 넘기곤 한다.







그런 의심을 하는 놈들, 그리고 설명해줘도 이해하지 못하는 놈들은 대부분 남자인데,

아마도 저런 생각이 머리속에 박혀 있는게 아닐까 싶다.

저런 생각을 하면 그나마 다행이고, 

대부분의 남자들은 모든 여자를 연애의 대상으로 보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참 많다.



어떤 사람과 연인이었다는 것은,

아마도 그 사람과 무엇인가 통하는 것이 있었고, 두 사람간에 공통점이 있었다는 걸 뜻할게다.

비록 어떤 이유때문에 연인에서 친구가 되었겠지만,

여전히 그 통하는 것, 공통점은 남아있기마련이고,

그래서 난 그 녀석들과 남들에겐 하지 못하는 속에 있는 말을 꺼낼 수 있는 그런 친구로 지내는 것이 편하고 좋다.

(머리끄댕이 잡고 싸우며 온갖 감정 다 상하며 헤어진 것이 아니라,
서로가 맞지 않음을 인정하고 합의하에 헤어진 적이 많은지라 그게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중얼중얼>에 이런 말을 적은 적이 있다.



모든 관계의 원칙은 하나다. 행복.

0과 1, 그리고 그사이 어딘가에 있는 인간관계 어느것이든

그것을 불안하지만 온전한 하나의 관계로 인정하고 그 속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저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한다.

그리고 내가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이 행복하다면,

(굳이 누군가가 규정지어 놓은 1이라는 인간관계가 아니라도)

그것만으로도 난 충분히 행복하고 고맙다.




제발...자신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그런 관계는 존재하지 않다고 단정짓는 지랄 좀 안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런 얼토당토 않은 의심의 눈초리에서 벗어나려면 이제 슬슬 애인을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 이제 슬슬...기지개를 펼 시기다...ㅋㅋㅋㅋ





And

역사는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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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정신이면 차 끌고 봉하마을로 달려갈까봐

만취하고 나서야 겨우 마음을 가다듬은 오늘 아침...


집에서 혼자 찌질거리며 영결식을 보다가 저 비열한 웃음을 보고야 말았다.

조용히 집에서 있으려고 했건만 저 ㅅㅂㄻ의 웃음 때문에

결국 '시청 -> 서울역 -> 술 -> 연화장 -> 술' 코스를 밟고야 말았다.



연화장의 빵상..저 구부정한 자세는 어딜가나..;;



아직 20대였을 때까지만 해도

'역사는 반복된다. 하지만 그 반복을 거듭하며 아주 조금씩 진보한다.'

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2002년 겨울...

'다시는 민주당에 투표할 일이 없을 거라며' 민노당에 마음의 빚을 지면서도 그 분께 한 표를 던진 이유도 그것이었다.


하지만 서른줄에 접어든 어느 날 부터인가 역사는 단지 반복될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조금씩 진보한다는 것은 단지 착각일 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과 같이 나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한 삶을 택하는 것이 옳은 길이라는 것을,

내가 택한 길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 요즘이다.


정말...정말...죄송스럽고 감사드립니다.

당신을 보며 오늘 흘린 눈물이 헛되지 않도록 정말 열심히 노력할께요.



ps.
http://imnews.imbc.com/replay/nwdesk/article/2355927_2687.html
"낮 동안 노란 풍선으로 가득 찼던 이곳 연화장은 지금은 추모객들의 촛불로 붉게 물들고 있습니다."
오해정 기자의 이 말...거짓말이다.
곳곳에서 울먹이는 분들, 안타깝고 분통한 마음에 서럽게 오열하는 분들은 정말 많았고 나도 그 중 하나였지만
촛불은 없었다.(거의 없었다)
이쁘니까(내가 좋아하는 스탈이니까) 이번 한번은 이해해 드린다..;
그래도 제발...없는 얘기는 지어내지 말자.
없는 말 지어내지 않아도 그 분은 우리에게 과분한, 너무 일찍 맞이한 대통령이었다는 것,
우리집 나우도 알고 있다.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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