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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10.13 중얼중얼
- 2009.10.07 나우와 함께 살기
- 2009.09.30 중얼중얼
- 2009.09.22 중얼중얼
- 2009.09.21 그녀가 있어서 야구팬은 행복하다, 'I♥베이스볼'의 김석류 아나운서
- 2009.09.20 '탐나는도다' 어렵게 보기 - (2) 인조는 왜 소현세자를 죽였을까? 12
- 2009.09.15 '탐나는도다' 어렵게 보기 - (1) 미친 할아방은 왜 제주도에 있을까? 6
- 2009.09.09 한성별곡 - 正
- 2009.09.09 후추 10년
- 2009.09.04 용두사미라고 하기엔 뱀한테 미안한, MBC 납량특집극 '혼'
다가오는 날은 언제나 새롭게 또 시작하는 거야
친구네 강아지 보석이와 아주 잠깐 같이 살았던 방나우는,
화장실을 보석이에게 빼앗긴 후 발코니에 똥오줌을 싸갈겼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평하게 쳐자곤한다.
이렇게 벌을 주어도 아주 잠깐 한눈을 팔면 처음부터 다시 저 과정을 반복...
그래도 나우와 함께면 언제나 일상이 즐겁다.
오래오래 같이 살자 방나우~
잠도 오지 않고 매일 밤 추억이 있던 장소를 하릴없이 걷기만 하던 시절...
얼마나 더 아파야 하는지 언제쯤 잊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던 그 때...
문득 쳐다본 새벽의 하늘은 너무도 아름다웠고 이 하늘을 볼 수 있는 것은 신의 축복이라 느껴졌다.
1. 어떤 지인이 열혈 남성야구팬에게 여자사람을 소개시켜줬다. 그런데 그녀가 예쁘장하고 귀여운데다 말도 잘 통한다. 야구팬의 반응은?
→ ^______^
2. 그런데 그녀가 야구팬이라 야구장에도 같이 갈 수 있다.
→ Olleh~!!
3. 그런데 알고보니 그녀는 굉장한 야구광이다. 그녀와 야구를 같이 보며 OPS, RC, BB/K, WS 등 전문적인 야구통계와 선수들의 타격 및 수비, 투구 자세, 그리고 시시콜콜한 야구선수들의 뒷얘기에 대해 얘기할 수 있다.
→ 그녀는 이미 여신. 매일 업고 다녀도 좋다. 명품백을 사줘도 전혀 아깝지 않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아서
1번에 해당되는 여성을 만나는 확률도 희박한데다,
2번처럼 야구장에 같이 가는 건 감지덕지, 3번은 현실속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인터넷 상에는 가끔있다).
이런 이유로, 그리고 야구가 아니더라도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얘기는 많기에
내 경우엔 내가 열혈 야구광인 것을 여자친구에게 굳이 먼저 알리지는 않는다.
(물어보면 신나서 야구얘기를 하겠지만, 야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야구 얘기란 여자에게 군대얘기하는 것과 같기에..;;)
아마 많은 야구팬들이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으리라...
그런데 상상속에만 존재하던 야구광들의 여신이 현실에 등장했으니
그녀가 바로 KBS N Sports 'I♥베이스볼'의 김석류 아나운서.
출처: http://www.kbsn.co.kr/sports/sub04.asp
뛰어난 미인은 아니지만 귀엽고 상큼한 그녀의 외모나 신상명세 같은 것들은
네이버 검색을 통해서나 그녀의 미니홈피에서 확인할 수 있으니 생략하고
비교적 심도깊은 인터뷰 두 개 링크~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134645
그리고 이건 김석류 아나운서에 대한 야구팬들의 뜨거운 관심,
http://mlbpark.donga.com/bbs/list.php?bbs=mpark_bbs_kbo&s_work=search&select=ss&keyword=%B1%E8%BC%AE%B7%F9&x=0&y=0
어쨌든 그녀가 있어서 야구팬들은 너무 행복하다.
마지막으로 8월23일 두산 베어즈 인터뷰할 때의 의상 센스~!
(이러니 야구팬들이 안좋아할 수가 없다.)
관련글: 탐나는도다' 어렵게 보기 - (1) 미친 할아방은 왜 제주도에 있을까?
지난번 글에서는
'미친 할아방이 왜 임금의 자리에서 쫒겨나 제주도에서 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적었었습니다.
바로 이분 얘기였었죠.
오늘의 이야기는 '인조는 왜 소현세자를 죽였는가?'입니다.
사실 인조가 소현세자를 죽였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습니다.
정황상 그랬을 것이라 설을 제기하는 학자들이 있는 정도죠.
그럼에도 저런 자극적인 제목을 붙힌 것은 그저 조회수를 올려보려는 수작입니다..;;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어제(13회)의 결정적 장면을 몇 가지 보고 넘어갑니다.
이 중 일부는 오늘의 주제와 관련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고,
일부는 버진이와 박규 도령의 눈물이 너무도 아파서 이들을 아끼는 마음에 한 번 더 보고자 하는 개인적인 이유입니다.
결정적 장면 1.
"귀양다리 너만 아니었음, 너만 아니었음... 나는 벌써 일리암이랑 떠났을꺼라.
왜 내앞에 나타나서 왜 내인생을 망치나? 왜?
귀양다리 니가 싫다."
이 장면이 너무도 가슴 아팠던 것은 버진의 눈물때문이 아니라
사랑하면서도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아파하는 모습을 그저 보기만 해야하는 귀양다리의 모습이 너무도 안쓰럽고 공감됐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버진이가 웃어주는 모습을 귀양다리는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요...
(일리암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관계로) 귀양다리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버진이가 너무 야속했습니다.
(이 장면에서는 배경음악이 아주 잘 어울렸었는데요, 가사가 딱 귀양다리의 심정이었습니다.
이 곡은 하울의 '그저 말하고 싶어'입니다.
http://www.imbc.com/broad/tv/drama/tamra/ost/index.html
조용한 기타 선율에서 성시경의 명곡인 '두사람'과 비슷한 분위기가 느껴지더군요.)
결정적 장면 2.
같은 이유로 일리암을 구해내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귀양다리의 눈물도,
강제로라도 버진의 마음을 가져보려던 귀양다리의 행동도 참 많이 공감 갔습니다.
(물론 두 번째 행동은 나쁜 짓입니다만..쿨럭..;;)
그나저나 비단 옷을 입은 버진은 너무 귀엽고 예쁘더군요. 반할 뻔 했습니다.
이외의 결정적 장면은 인조와 소현세자의 이야기를 하면서 기회를 봐서 껴넣겠습니다.
여기서 더 길어지면 주제와 다르게 '탐나는도다 13화 감상기'가 될 것 같거든요.
이번 이야기도 이 전과 마찬가지로 쓸데없이 길기만 하고 재미없는 글이 될 것이라 생각하기에,
역사에 관심없는 분들은 주저없이 백스페이스를 누르시기 바랍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지난번 이야기가 '광해군이 태어나 왕위에 오르고 폐위되어 제주도까지 가게된 기구한 사정'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이번 이야기는 '인조가 왕위에 오른 후 의심많은 인물이 되어가는 과정과 결국 아들인 소현세자와 그 일가를 죽음으로 몰고가게 된 과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인조와 그의 아들 소현세자
이괄의 난
건국이건 반정이건, 어떠한 이유에서 정통성이 없는 새로운 왕이 세워지면
이 과정에서 공을 세운 신하들에 대한 논공행상이 이루어지기 마련입니다.
반정 직후에는 반정 공신들의 위세가 왕권보다 강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논공행상을 통해서 새롭게 새워진 왕실의 안정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인조반정에 성공한 이후에도 역시 논공행상이 펼쳐집니다.
이괄은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기 직전 광해군에 의해 북병사로 임명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괄은 임지로 부임하지 않고 반정에 가담해버렸습니다.
반정군의 대장은 김류였지만, 실질적으로 반정군을 지휘한 것은 이괄이었습니다.
이괄이 없었다면 인조반정은 반정(反正)이 아니라
조선시대의 수많은 반란 중 하나가 될 뻔 했습니다.
이괄의 결단력으로 성공했으니 반정이지, 실패했다면 그저 쿠테타, 반란에 불과할 것이란 얘기입니다.
실제로 반정 전날, 대장 김류는 정보가 새어나갔다는 소식을 듣고 거사장소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집에서 근신하고 있었죠. 반란과 자신의 무관함을 보이기 위한 행위였습니다.
김류는 이괄이 대신 군사를 움직이자 그제서야 반정에 합류하죠.
인조반정에서 이렇게 큰 공을 세웠음에도 이괄은 이등공신에 책정되었습니다. 김류는 일등공신.
반정 다음날 이괄은 김류의 행위를 노골적으로 비난하였는데,
이는 서인들이 이괄을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거기에 그는 평안도병마절도사 겸 부원수로 임명되어 외직으로 축출되기도 하였습니다.
인조와 서인의 입장에서는 후금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 그와 같은 용맹한 장수가 필요한 것이었지만,
이괄의 입장에서는 일등공신으로 책정도 받지 못하고 외직으로 축출된 것과 같이 느껴졌을겁니다.
거기에다 문회, 이우 두 사람은 이괄을 역모혐의로 밀고합니다.
인조는 이괄을 잡아오라고 금부도사를 보내지만, 격노한 이괄은 오히려 이들을 죽이고 병사를 모아 서울로 진격합니다.
이에 인조는 위협을 느끼고 공주로 도망갑니다.
이괄은 19일만에 서울을 함락시키고 선조의 아들 흥안군을 임금으로 옹립하여 새로운 정권을 세웁니다.
그러나 이괄은 전열을 정비해 공격해온 관군에게 대패하고 이천으로 도망갔다가
부하들에 의해 목이 베어지고 반란은 평정됩니다.
이괄의 난은 인조정권이 기반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였습니다.
주요한 반정공신에게 단 19일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인조가 서울을 떠나자마자 대부분의 인물들이 이괄에게 투항한 것은
인조가 자신의 권력기반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깨닫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괄의 난은 후에 정묘호란이 일어나게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평안도를 지키던 이괄이 군대를 일으키면서 북방의 경비가 소홀해지기도 했고,
이괄의 난 이후, 서인들의 감시에 역모로 의심받을 것을 두려워한 지방 무관들은 군사훈련을 자제하여 군사들의 훈련이 크게 부족해졌으며,
이괄의 난의 주요 인물인 한윤이 후금으로 넘어가 인조의 친명배금 정책을 알려 후금이 조선을 치게되는 빌미를 주기도 했습니다.
인조는 이괄의 난을 겪으며 자신의 권력기반이 얼마나 약한지 깨닫게 되었을 겁니다.
그리고 1627년 정묘호란을 당한 후에도 반란 기도와 역모사건은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1624년 '이괄의 난' 이후, 1627년 '이인거의 역모사건', 1628년 '유효립의 역모사건', 1629년 '이충경의 난'이 발생하였습니다.
유효립은 광해군의 복위를 내세웠고, 이충경은 아예 조선과는 다른 새로운 사회 건설을 표방했습니다.
이런 끝모를 역모와 반란, 그리고 정묘호란을 겪으며 인조는 점점 의심이 많은 인물이 되어갑니다.
그리고 1636년 병자호란이 발생하여, 인조는 그 유명한 삼전도의 치욕을 당합니다.
삼전도의 치욕
1637년 청 태종에게 항복한 인조는 남한산성을 내려와 죄인임을 나타내기 위해 가시 박힌 자리에 앉아 대죄했습니다.
인조는 청나라 장수들의 인도를 받아 삼전도(지금의 송파구)에 가서 삼배구고두를 행합니다.
삼배구고두란 세 번 절하고 절할 때 마다 세 번씩 땅에 머리를 조아리는 것을 말합니다.
삼배구고두의 예를 행하면서 인조의 머리에는 피가 났다고 하는데, 정말 치욕스럽기 그지 없는 일이었습니다.
삼전도비
http://www.songpa.go.kr/user.kdf?a=songpa.menu.MenuApp&c=1001&cate_id=BB1205002010
치욕스러운 일이었지만 이는 인조가 자처한 일이었습니다.
후금(청)의 세력을 우려했다면,
군사력을 증강시켜 그들의 침입에 대처하는 한편, 그들을 다독이는 외교책을 취했어야 하는데 인조는 둘 다 하지 못하였습니다.
명을 치려는 후금의 입장에서 배후에서 위협하는 조선은 눈의 가시였을 겁니다.
이에 후금은 정묘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치지만,
이 때는 아직 명군의 견제도 생각해야 하기에 조선과 적당히 화의를 맺고 물러갑니다.
하지만 조선은 이후에도 전과 다름없는 외교정책을 취합니다.
이에 청은 조선을 더욱 강하게 압박할 필요를 느껴 병자호란을 일으킵니다.
생각이 있다면
군사력을 강화하던가, 중립외교를 펼치던가 해야하는데
인조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가 치욕을 당한 것이었죠.
광해군과는 전혀 다른 방식을 택해 결국 자신이 치욕을 자초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가운데 하나인 '햄릿'(http://100.naver.com/100.nhn?docid=188152)에서
클로어디스는 사랑과 권력을 얻기위해 왕이었던 자신의 형을 독살하고 왕위에 오릅니다.
일리암은 이 이야기를 인형극으로 꾸며 인조에게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전 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인조 역시 그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왕위에 오른 인물입니다.
인조는 군사를 일으켜 삼촌뻘인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임금이 된 인물이었습니다.
일리암의 인형극은 한마디로 '분위기 파악 못하는 정신나간 짓'이었습니다.
인형극을 지켜보며 점차 일그러지는 대신들과 인조의 얼굴이 이를 말하고 있죠.
"아 그깟 왕이 무엇이길래?
형제를 죽이면서까지 그 자리에 올랐단 말인가?"
라고 말하는 일리암의 대사는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인조에게 인형극을 보여주기 전에 박연(로버트 할리)에게라도 먼저 한번 보여주었다면,
상황을 저렇게 파국으로 몰아가지는 않았겠죠.
('탐나는도다'를 보면 일리암 얘는 줄곧 이런 분위기 파악 못하는 짓을 자주합니다.
조선의 물정을 모르는 이방인임을 고려해도 얘는 좀 심하죠.
오늘(14화) 방송분에서는 박규가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고 생각하더군요.
조금만 생각해보면 박규가 자신을 구하려고 한 행동임을 알 수 있었을텐데 말이죠.
좋게 말하면 순수한 거고, 나쁘게 말하면 개념이 없는 것인데,
어쨌든 그래서 저는 일리암이 별로 마음에 안듭니다.
전 별로 순수하지 않거든요..;;)
청에 볼모로 끌려가는 소현세자
병자호란의 결과로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 봉림대군(후의 효종)과 대군부인 장씨는 청의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게 됩니다.
소현세자가 비록 청에 볼모로 잡혀가는 치욕을 당했지만,
이는 역으로 당시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읽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됩니다.
명청이 교체되는 시기를 현장에서 목도한 소현세자는
명은 더이상 사대할 국가가 아니라 이미 지는 해였으며,
중원의 중심은 명이 아닌 청으로 기울었음을 직접 확인하게 됩니다.
이즈음 소현세자는 새로운 사상과 문물을 접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인물을 만납니다.
바로 선교사 아담 샬입니다.(http://100.naver.com/100.nhn?docid=104145)
아담 샬은 해박한 과학 지식을 바탕으로 명에서 역서와 대포를 주조하는 일을 맡았었고,
청이 중원을 장악한 후에도 천문대장을 맡아 시헌력을 만든 인물입니다.
아담 샬과 소현세자의 숙소는 가까운 곳에 있어 둘은 자주 만나 친분을 쌓았다고 합니다.
소현세자에게 아담 샬은 새로운 사상과 문물을 접할 수 있는 기회였고
아담 샬에게 소현세자 역시 조선에 천주교를 전파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 외에도 조국이 아닌 이국땅에서 생활하는 서로의 처지가 서로를 깊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기도 할테죠.
소현세자는 그에게 천문서적, 과학서적, 천구의 등을 선물받아 새로운 문물을 접합니다.
어쨌든 소현세자는 북경에서 새로운 사상(천주교)과 새로운 문물을 접하며 개방적인 사고를 가진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의 개방적 사고는 '탐나는도다' 13화의 첫부분에도 등장합니다.
서린과 만나는 소현세자
서린이 "농사보다 훨씬 이익을 취할 수 있는 기술과 장사를 지나치게 천대한 것이 문제"라 얘기하자
소현세자는 이에 동의하며 청과의 교역확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에 서린은 다시 "일본의 대지마가 개항을 통해 많은 이득을 취하였다며 조선도 개항만 한다면 많은 이득을 취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합니다.
여기서 박규는 "무분별한 개항은 독이 될 수 있다"며 딴지를 겁니다.
서린과 박규의 갈등을 풀어갈 앞으로의 이야기가 궁금한데, '탐나는도다'는 앞으로 2회분만이 남았습니다..;;
아직 해야할 얘기가 많을 듯 한데 20부작이 16부작으로 축소되는 바람에 이야기 진행이 허술해지지나 않을 지 걱정입니다.
다시 소현세자로 넘어와서,
서양문물과 사상에 거부감이 없는 개방적인 사고를 가진 소현세자가 왕위에 올랐다면,
조선은 틀에박힌 성리학에서 벗어나 새롭게 발전해 나갈 수도 있었을 겁니다.
물론 사대부들의 거센 반발로 소현세자가 꿈꾸던 세상은 좌초할 가능성이 높았지만,
'최소한 그가 임진왜란 이후 이미 망해버린 것과 마찬가지인 조선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하지만 역사에서 가정은 부질없는 짓일 뿐이고,
소현세자는 청에 볼모로 잡혀간 지 9년만에 귀국하지만, 귀국 두 달만에 병에 걸려 죽고맙니다.
타국의 9년 생활도 견뎌낸 30대의 건장한 청년이 귀국하자마자 병에 걸려 죽은 것도 이상한데다,
그의 사체에서는 독살의 흔적이 역력했기에
의심의 눈초리는 소현세자를 의심했던 인조에게 넘어갑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인조가 소현세자를 독살했다는 명확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면 인조는 왜 소현세자를 의심하게 되었을까요?
소현세자를 의심하게 된 인조
'이괄의 난' 이후 끊임없이 이어지는 반란과 역모에 인조가 의심이 많아졌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설명했습니다.
그러면 왜 인조는 자신의 아들인 소현세자까지 의심하게 되었을까요?
소현세자가 청에 볼모로 잡혀간지 3년째인 1640년,
조선은 인조의 병을 이유로 소현세자의 일시 귀국을 청에 청합니다.
이에 청은 인조의 3남 인평대군과 소현세자의 장남인 원손 석철을 심양으로 불러들인 후에야
소현세자의 귀국을 허락합니다.
소현세자가 귀국하기 전 청 태종은 직접 세자의 환송연을 열어주며
세자에게 안장을 한 말과 대홍망룡의를 선물하며 입으라고 권합니다.
이 대홍망룡의가 문제였습니다.
대홍망룡의는 한나라의 국왕이 입는 옷으로 세자가 입는다는 것은 인조에게 큰 실수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소현세자는 '국왕의 장복'이라며 거절하였으며 청태종도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던 신득연이 이를 조선에 알렸고
조선에는 '세자가 대홍망룡의를 입고 춤을 추었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이 사건은 과거 임진왜란 때 명이 선조를 무시하고 광해군을 왕처럼 대했던 것처럼,
청 역시도 자신을 폐하고 소현세자를 왕으로 세우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인조가 하게 된 계기가 됩니다.
인조는 먼저 나가 귀국하는 세자를 마중하겠다는 세자시강원(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관청) 관원들의 청을 묵살했으며,
어의를 보내자는 내의원의 청 역시 거부하였습니다.
그리고 세자를 맞이 하는 의식을 모두 폐지시켜버립니다.
따라서, '탐나는도다' 11화에서 보여주는 소현세자의 일시 귀국을 축하하는 이 연회장면은 실제로는 없었을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연회장면에서는 앞서 설명한 '소현세자에 대한 인조의 의심'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소현세자에게 술을 권하는 인조
인조는 저렇듯 거칠게 술을 따른 후 말합니다.
"왕의 자리가 그렇게도 탐이 나더냐?
이 애비가 언제 죽을지 알아보러 온 것이겠지.
청황제를 등에 업고 이 나라를 차지해 바칠 심산이냐?"
인조 뿐만 아니라, 반청을 기치로 인조반정에 성공한 서인들에게
소현세자의 개방적인 태도는 부담스러웠을 겁니다.
어쨌든...인조는 이후 소현세자를 끊임없이 의심합니다.
그리고 청에 볼모로 간지 9년만에 소현세자는 영구 귀국합니다.
소현세자와 그 가족들의 비극적 최후
영구 귀국한 소현세자는 두 달만인 1645년 4월 26일에 급사합니다.
소현세자가 4월 23일 병석에 누운 이유는 학질이었습니다.
이에 어의 이형익이 세자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침을 놓았는데, 세자는 3일만에 세상을 떠납니다.
원래 조선에서는 왕이나 세자가 죽게되면 치료를 한 시의를 국문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런데 인조는 어의 이형익을 옹호하며 국문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형익은 원래 인조의 후궁인 소용 조씨의 사가에 출입하던 의원이었는데 그녀의 추천으로 어의가 된 인물이었는데,
소용 조씨는 세자와 관계가 매우 안좋은 인물이었습니다.
거기에 인조실록에는 "세자가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라는 말까지 적혀있습니다.
또한 인조는 소현세자의 장례절차 역시 최대한 간소화 시켜버렸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들로 인해 인조가 소현세자의 죽음에 관련이 있다는 의심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인조는 소현세자의 가족들에게 손을 뻗히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인조는 세손이 되어야 할 소현세자의 아들 석철이 어리다는 이유로 무시하고,
소현세자의 동생 봉림대군(후의 효종)을 세자로 책봉합니다.
이제 인조는 청과 결탁하여 자신을 몰아내고 세자를 세우려 했다는 의심으로 세자빈 강씨를 압박합니다.
인형이나 동물을 마당이나 베갯속에 묻어두고 상대방을 저주하는 사건이나 음식에 독을 넣는 사건을 벌여 그 죄를 세자빈 강씨에게 돌렸습니다.
강씨를 죽이라는 인조의 명령에 신하들은 강하게 반대하였지만,
결국 인조는 세자빈 강씨를 쫒아낸 후 사약을 먹게 해 죽여버립니다.
그 후 인조는 세자빈 강씨의 어머니를 처형하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 즉 자신의 친손자 셋을 제주도로 유배를 보내버립니다.
세손이 되어야 마땅했을 석철은 다음해 9월에 제주도에서 사망합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 석린 역시 석달 후 죽고 맙니다.
실록에는 풍토병으로 기록되었지만 이들의 죽음에도 의구심은 남아있습니다.
소현세자가 죽은 후 청나라 장수 용골대는 석철을 자신이 데려다 키우겠다고 말했었는데,
인조는 청에서 석철을 키워 인조를 폐위시키고 석철을 왕으로 세울 것이라 의심했습니다.
인조로써는 석철을 죽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죠.
어쨌든 소현세자 일가는 광해군 일가와 비슷하게 이렇듯 안타까운 최후를 당합니다.
마지막으로...
탁월한 중립외교와 군사력 강화: 광해군
친명배금 정책과 군사력 도외시: 인조
여기서 왠지 지난 대통령과 현 대통령이 느껴지시지 않나요?
군대를 다녀온 대통령과 안 다녀온 대통령,
밀리터리 매니아로 널리 알려지고 국방력 강화를 위해 국방비를 증강시키고 국방개혁안을 만든 대통령과
그 국방개혁안을 후퇴시킨 대통령,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90601006006
최신 정찰기인 글로벌 호크를 도입하여 정보력을 강화시키려 했던 그러나 미국의 반대로 아쉽게 실패한 대통령과
미국이 뒤늦게 팔겠다는데도 안사겠다는 대통령,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5/23/2009052300056.html
북한을 다독이며 미국에도 할말을 했던 대통령과 미국만 쳐다보는데 정작 미국에도 무시당하는 대통령
http://media.daum.net/politics/north/view.html?cateid=1019&newsid=20090609103112602&p=viewsn
여러모에서 광해군과 인조는 전 대통령과 현 대통령이 떠오르게 합니다.
'탐나는도다'의 포스터
('탐나는도다'와 관련된 모든 그림의 출처는 http://www.imbc.com/broad/tv/drama/tamra/cast/index.html 입니다.)
MBC의 여름 특선 드라마 '탐나는도다'는 참 매력적인 드라마입니다.
깜찍하고 귀여운 버진 역의 서우의 연기도 그렇고,
일리암과 박규 두 꽃도령과 버진의 애뜻한 마음도 참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거기에 서린상단의 음모와 이를 파헤쳐가는 박규의 이야기를 통해 추리극의 형식을 취함으로서
극의 긴장감을 유지하는 과정 역시 매우 탄탄합니다.
탄탄한 극본, 신인급 위주의 캐스팅임에도 깔끔한 연기, 멋진 화면 구성이 한데 어우러진 좋은 드라마죠.
하지만 이런 류의 잘 만든 드라마들이 늘상 겪는 '시청률에 있어서 고전' 덕택에
결국 조기종영이 결정되고 말았습니다다.(뭐 MBC는 조기종영이 아니라고 항변하지만...)
자극적이고 생각없이 볼만한 드라마들이 인기를 얻는 일이야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웰메이드 드라마들이 늘 시청률의 늪에서 허우적대다 조기종영되는 일은 아쉽기만 한 일입이다.
그건 그렇고, '탐나는도다'는 흥미로운 역사적 인물들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폐위된 광해군과 그를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인조,
그리고 인조가 살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가 그들입니다.
미친 할아방 광해군
인조와 그의 아들 소현세자
'탐나는도다'의 토요일 방송분(12일)에서는 드디어 임금(인조)이 등장했습니다.
오랜만에 TV에서 보는 이병준 씨의 모습이 반가웠습니다.
TV에서 이병준 씨의 캐릭터는 주로 코믹스러운 모습, 평범하지는 않은 모습이었는데,
일리암을 대하는 태도나, 아들인 소현세자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아들인 소현세자에게 "왕의 자리가 그렇게도 탐이나드냐? 이 애비가 언제죽을지 알아보러 온거겠지?"라고 하죠.)
여기서도 역시나 조금은 멍청한듯한 하지만 의심이 매우 많은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인조 임금은 인조반정(仁祖反正)을 통해 그 전의 임금이었던 광해군(光海君)을 폐하고 왕이 되었습니다.
적장자 승계를 통해 정실왕비의 맏아들이 아니면 왕이 될 수 없는 조선의 법도에 따라
원래 인조는 임금이 될 수 없는 인물이었으나,
임금을 끌어내리고 스스로(정확히 말하면 스스로라기 보다는 신료들에 의해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보니,
자신도 언제든 그 자리에서 내려올 수 있다고 생각하여 아들인 소현세자까지 의심하게된 인물입니다.
(정실왕비의 소생을 직계, 후궁의 소생을 방계라고 합니다.)
여기서는,
임금이었던 미친 할아방은 왜 제주도까지 가서 그렇게 살게되었는지,
인조가 왜 그렇게 의심많은 왕이었는지,
그 의심에 소현세자와 그의 가족이 어떻게 죽어갔는지에 대해서 조금은 자세히 적을 생각입니다.
(글이 좀 길다 싶으면 두 번에 걸쳐 얘기할 생각입니다.)
이 이야기에 대해 쓰다보면 광해군과 그의 아버지 선조까지 올라가야 하는지라 재미도 없이 긴 글이 될 것 같으므로,
역사에 관해 관심없는 분들은 주저없이 백스페이스를 누르시는 것이 좋을 듯 싶기도 합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미친 할아방(광해군)은 왜 제주도에 있을까?"입니다.
다시 등장하신 미친 할아방, 광해군
광해군은 1575년에 태어나 1641년에 사망하였습니다. 우리나이로 67세, 만으로하면 66세이죠.
따라서 드라마 소개에 66세로 나온다는 것은 광해군이 곧 죽을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탐라를 기반으로 하여 그를 다시 왕으로 올리고 새로운 국가를 세우려는 서린과 그 상단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갈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겠죠.
뭐, 드라마는 그저 드라마일 뿐이고, 원작 또한 본 적이 없는지라 정말 그렇게 될지 확신은 못하겠습니다.
다만 역사를 비춰 봤을 때는 그렇게 될 것이라 짐작할 뿐이죠.
인조반정(仁祖反正)
(위키피디아: http://ko.wikipedia.org/wiki/%EC%9D%B8%EC%A1%B0_%EB%B0%98%EC%A0%95)
반정(反正)은 글자 그래로 올바른 상태로 되돌린다 라는 뜻입니다.
인조 임금이 그 전의 '올바르지 못한 시대'를 올바른 상태로 되돌렸다는 의미지요.
따라서 인조 임금 전의 시대, 즉 광해군의 시대는 '어지럽고 올바르지 못한 시대'일 수 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인조반정을 일으킨 사람들(주로 서인들)에게
광해군의 시대는 '어지럽고 올바르지 못한 시대'였을까요?
인조반정시 인조와 서인들은 광해군을 폐위시키게된 명분으로 광해군의 세 가지 죄목을 다음과 같이 내세웁니다.
1. 폐모살제(廢母殺弟)를 논하였다.
2. 대규모 토목공사로 민생이 피폐해졌다.
3. 명을 사대하지 않고 후금과 내통하여 명을 배신하였다.
폐모살제
첫 번째로 폐모살제란,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였다'는 뜻입니다.
친어머니는 아니지만 명몽상 분명히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하려 하였고,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광해군은 어머니와 동생에게 왜 이런 일을 행한 것일까요?
이를 알기 위해선 좀 긴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인조전후의 임금들(선조-광해군-인조-효종)은 적장자의 법통에 따라 왕이 된 인물들이 아닙니다.
선조는 중종의 아홉째 아들인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입니다.
(조선최초로 후궁의 아들(방계)이 왕이 된 케이스죠. 선대인 명종이 후사없이 급사하여 운좋게 왕이 되었습니다.)
광해군은 선조의 후궁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입니다.
인조는 선조의 후궁 인빈 김씨의 셋째 아들인 정원군(원종)의 첫째 아들입니다.
효종역시 인조의 둘째 아들로 소현세자가 비명횡사 하지 않았다면 왕이 될 수 없는 인물이었죠.(그나마 효종은 직계이긴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왕조의 비극은 거의 이런 정통성의 문제에서 시작됩니다.
정통성의 문제가 있으면 왕권이 불안정할 수 밖에 없었고,
광해군의 비극도 여기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죠.
앞서 말했듯이 광해군은 선조와 후궁인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로 적자도 장자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가 세자가 된 것은 임진왜란 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후궁의 둘째아들에 불과한 광해군이 어떻게 임금이 되었나
선조의 가계도에서 볼 수 있듯이 선조의 아들은 매우 많았습니다.
저 중에서 임진왜란 후에 태어난 영창대군을 제외하면,
임진왜란 직전에 이미 13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후궁 태생입니다.
당연히 후궁들간에는 엄청난 암투가 있었고
정비의 몸에서 난 적자는 없고 후궁 소생의 아들만 득실대는 이 상황에서
왕자들 사이에서도 선조의 신임을 얻기위한 경쟁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임진왜란이 발생한 것은 광해군에게는 행운이었습니다.
왜군은 파죽지세로 북상중이었고, 도성을 버리고 피난을 가려고 논의 중인 상황에서
종묘사직의 장래와 민심수습을 위해 왕세자 책봉이 건의되었고,
광해군은 단 하루만에 파격적으로 왕세자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전쟁이 끝나고 상황이 안정된 후의 엄청난 논란과 파란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선조와 함께 경복궁을 떠나 의주로 피난을 가면서 왕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버렸습니다.
피난길에 같이 오른 문무관은 100명도 되지 않았고,
왕의 가마가 아직 한성을 떠나지 않았음에도 경복궁은 백성들에 의해 약탈당하고, 왕자궁은 불질러졌습니다.
(사실 조선은 이 때 이미 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세워져도 이상하지 않을 나라였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조선은 망하지 않았고, 이후부터 신하들이 왕을 선택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됩니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선조는 왕세자 광해군에게 왕으로서의 일부 권한을 넘기는 분조(分朝)를 단행합니다.
광해군에게 인사권과 상벌권을 넘겨버린 거죠.
그리고 광해군은 선조의 명에 따라 분조를 이끌고 함경도로 떠나게됩니다.
이때 광해군은 눈부신 활약을 펼치며 백성들에게 아직 조정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알립니다.
광해군은 함경도, 평안도, 강원도와 황해도 등지를 옮겨다니며 민심을 수습하고, 의병의 모집과 전투의 독려,
군량과 말먹이의 수집 운반 등 전방위 활약을 펼칩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왕세자로서의 위치를 굳히게 되죠.
이후 명의 원병으로 전황은 지지부진해지고, 명과 일본은 강화를 논의하고,
선조와 광해군은 다시 서울로 돌아오게 됩니다.
임진왜란 시기의 눈부신 활약으로 광해군의 입지는 단단해졌지만,
한편으로 선조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1594년 송유진은 난을 일으켜 선조를 폐하고 광해군을 왕으로 세우겠다는 기치를 내걸었고,
명은 칙서를 통해 노골적으로 선조를 무시하고 광해군을 추켜세웁니다.
후에 인조가 소현세자에게 그랬듯이 선조도 자연스레 광해군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권력은 부자도 나누지 못하는 것이었으니까요.
선조의 의심에 덧붙여 전쟁시에는 광해군을 추켜세웠던 명나라가 이번엔 광해군을 흔들기 시작합니다.
정실왕비가 아닌 후궁 소생인데다 둘째 아들인 이유로
광해군의 왕세자 책봉을 인정하지 않았던 거죠.
여기에 엎친데 덮친일이 발생합니다.
1602년 선조는 광해군보다도 9살이나 어린 왕비를 맞이 하였는데, 이가 바로 인목왕후(훗날 인목대비)입니다.
그리고 1606년 봄 그녀는 왕자를 낳게 됩니다. 바로 영창대군.
'쾌도 홍길동'의 광해군과 영창군
(KBS의 퓨전사극 '쾌도 홍길동'에서 미친 왕으로 연출된 이광휘(조희봉 분)가 광해군,
그리고 그에게 죽임을 당할 뻔하다 겨우 살아난 왕자 이창휘(장근석 분)가 영창대군입니다.)
http://www.kbs.co.kr/drama/honggildong2008/about/cast/24936_index.html
후궁 소생인데다 둘째 아들이란 이유로 명나라의 왕세자 책봉 승인이 나지 않는 상황에서
정실 왕비 소생의 왕자 영창군이 태어나게 됨으로서,
조정은 또다시 왕세자 논란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에 선조는 매일아침 왕세자의 문안을 거부하고 금지시켜버립니다.
광해군으로서는 초초하기 이를데 없는 곤란한 상황이었겠죠.
이 상황에서 광해군에게는 임진왜란에 이은 두 번째 행운이 발생합니다.
영창군이 3살, 인목왕후가 25살, 광해군이 34살이던 1609년 선조가 눈을 감게 됩니다.
영창군은 아직 세 살의 갓난 아기인데다, 전장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광해군을 상대하기에
인목대비는 아직 아직 어린 존재일 뿐이었습니다.
인목대비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들인 영창군을 보호하기 위해 신속히 광해군을 즉위시키고,
'어린 대군이 마음에 걸린다'는 선조의 유언을 공개하는 일 뿐이었습니다.
(선조의 죽음을 독살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왕이 된 광해군은 그를 왕위에 올리기 위해 죽음도 불사하였던 대북파를 중용합니다.
그 중 정인홍과 이이첨은 핵심인물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후에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쫒겨나게 된 핵심인물들이기도 합니다.
후에 간신의 대명사로 불리게 된 인물들이기도 하지요.(실제로 간신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이들은 광해군의 동복형인 임해군을 교살시켰으며, 역모사건이 일어나자 서인과 남인들을 핍박합니다.
그리고 또다른 역모사건을 유도하여 인목대비의 폐위 논란을 일으키고, 영창대군을 살해합니다.(광해군일기)
여기까지가 인조와 서인들이 인조반정을 일으킨 세 가지 이유 중 첫번째 이유입니다.
광해군은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죽이라는 신료들의 간언에도 이를 행하기를 주저했기에
'광해군이 직접 이들을 죽인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하지만, 광해군이 직접 지시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결국 그가 중용한 대신들에 의해 그들은 살해당하였기에
이는 광해군의 업보이긴 했습니다.
대규모 토목공사
이제 두 번째 이유인 대규모 토목공사입니다.
전란후 광해군은 땅에 떨어진 왕실의 위엄을 세우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불타없어진 궁궐을 짓기 시작합니다.
창덕궁, 창경궁, 경덕궁(경희궁), 인경궁, 자수궁 등 많은 궁궐을 짓는데 집착했습니다.
임진왜란 후 경복궁과 창덕궁 등이 불타버린 상황에서 궁궐을 새로짓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는 규모가 큰 궁궐을 너무나도 많이 지어버렸습니다.
궁궐 건설에 필요한 자재와 인력 그리고 재원의 조달 문제가
아직 전란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백성들에게 엄청난 고통으로 다가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두 번째 이유인 대규모 토목공사는,
'어쩔 수 없었지만 너무 과했다' 정도로 정리하고 싶군요.
명을 배반했다?
여기까지 이유만 보면 광해군은 폐위되어 마땅한 임금이었습니다.
왜란때문에 안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여 민생을 피폐하게 만들었고,
(그가 직접하지는 않고 신하들이 했다지만) 결과적으로 형과 동생을 죽이고 어머니를 폐하려했으니까요.
하지만 그는 그렇게까지 나쁜 왕은 아니었습니다.
'쾌도 홍길동'에서 묘사한 것과 같은 미친 왕도 아니었구요.
인조반정을 일으킨 사람들은 광해군이 명을 배신했다고 하지만 당시 정세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후금의 누르하치는 여진을 통일하고 명에게 강력한 위협을 가하는 세력으로 성장하였습니다.
명을 사대하는 조선의 입장에선 명의 눈치를 보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만
그에 맞서는 세력으로 성장한 후금의 눈치도 봐야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이 택할 수 있는 선택은 딱 세 가지입니다.
1. 대의명분을 중시하여 명을 지원하고 후금을 배척한다.
2. 과감하게 명을 배척하고 후금을 지원한다.
3. 명과 후금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다 이긴 쪽에 붙는다.
외교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패는 보여주지 않고 어장관리 하듯이 놀다가 결국에 실리를 취하는 것입니다.
광해군은 이런 실리를 추구한 대표적인 군주였습니다.
외교에 있어서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이렇습니다.
"명과 청 사이에서 탁월한 중립외교를 펼쳤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겨우 십 수년.
전란의 상처를 다독이기에도 바쁜 와중에 사나운 후금과 일일이 맞대응 할 여력은 조선에게는 없었습니다.
이에 광해군은 후금을 다독이며 유연하게 대처하여 평화를 유지하고자 하였습니다.
어차피 조선의 입장에서 여진은 오랑캐.
사납지만 변변찮은 오랭캐에게 명분을 이야기해봐야 '쇠귀에 경읽기'이므로 살살 구슬리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이와함께 후금이 쳐들어왔을 때를 대비해 광해군은 힘을 키우기 시작합니다.
먼저 후금에 첩자를 보내어 후금의 동향을 탐지하고 군사 훈련에 집중하고 방어태세를 점검하였습니다.
각종 화포를 제작하기 위해 조총청을 화기도감으로 확대, 개편하였고
당시 원수와 같았던 일본과 국교를 재개하여 일본의 조총을 확보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강력한 군사력이 없어서 임진왜란을 겪었던 군주로서 당연한 선택이었지요.
하지만 중립외교만으로 당시 정세에 대처하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명은 청의 위협에 대처하고자 조선에 원병을 요청했고,
왜란에서 명의 은혜를 입은 조선은 원병요청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광해군은 원병을 피하고자 노력하였지만 결국 어쩔수 없이 도원수 강홍립 휘하의 조선군 1만을 보내고 맙니다.
이 중 5천은 임란 이후 공들여 키운 정예 조총병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원군은 심하전투에서 대패했고,
조선의 입장에서는 타국간의 전쟁이기에 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해 강홍립은 후금에 항복합니다.
강홍립은 후금에 억류된 와중에도 광해군에게 각종 정보를 보냈고,
이는 후에 광해군의 외교정책의 기본 자료로 활용되었습니다.
이런 광해군의 외교정책은 '실리'라는 면에서 보면 당연한 것이었지만,
사대주의에 찌들은 조선 사대부들에게는 말도 안되는 일이었습니다.
사대부들에게 광해군의 외교정책은 '강상 윤리를 무너뜨린 행위'였을 뿐이었지요.
그리고 전란의 충격에서 아직 회복하지 못한 조선에게 원병 1만은 심각한 악영향을 불러왔습니다.
당시 전투병은 평안도 3500, 전라도 2500, 황해도 2000, 충청도 2000 등 전국 각지에서 불러모았는데,
전란을 수습하기에도 힘든 상황에서 건장한 장정 1만을 불러모으는 과정에서
각지의 불만이 속출하는 것은 불보듯 뻔한 상황이었습니다.
거기에 병사 1만에게 지급할 군량을 마련하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었지요.
이 과정에서 백성들의 불만은 하늘을 찌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원하지 않은 파병으로 인해 광해군은 백성과 사대부 양쪽의 반감과 불만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만 했고,
이것이 광해군의 비극이고 운명이었습니다.
임해군과 영창대군의 죽음, 인목대비의 폐모논의 등으로 인한 대북의 정권 장악과 전횡, 그리고 서인의 몰락,
대규모 토목공사와 파병으로 인한 백성의 불만 등으로 인해 조선사회는 매우 동요하고 있었고,
광해군을 폐위시킬 명분은 이미 충분히 갖춰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인조반정으로 인해 결국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됩니다.
만약 광해군이 좀 더 정치력을 발휘하여 대북파만을 중용하지 않고 신료들을 조정하는 데 성공했다면,
대규모 궁궐 건설을 최대한 자제하고 최소한의 공사만 시행했더라면,
아마도 폐위만은 피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역사에 가정은 없습니다.
하지만 광해군의 행적은 임진왜란이 낳은 역사적 산물로 어쩔 수 없다는 것이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안타까운 광해군 일가의 최후
광해군은 인조반정 후 부인 유씨, 폐세자 부부와 함께 강화도로 유배됩니다.
그에게 영창대군을 잃은 인목대비는 광해군을 끝까지 죽이고자 했지만,
인조와 신료들의 반대로 광해군은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였다는 것을 반정의 명분으로 내세웠기에,
광해군을 쉽사리 죽일 수는 없었던 것이었죠.)
하지만 그는 곧 아들 부부와 아내를 잃고 맙니다.
폐세자는 유배된 집 마당에 땅굴을 파서 탈출을 시도하지만 곧 발각되었고,
인조의 명에 따라 자진하게 됩니다.
그의 아내 폐세자빈은 식음을 전폐하였다가 스스로 목을 매 자살합니다.
그리고 몇 년 후 부인 유씨마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유배지는 여기저기로 옮겨지다가 1637년 제주도로 옮겨집니다.
1637년은 광해군에게 명을 배반했다고 했던 인조가 청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세 번 절하고 이마를 아홉번 땅에 대며
항복선언을 한 삼전도의 치욕을 당한 해입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4년 후인 1641년 제주도 유배지에서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16년간 재위했던 그가 1622년 폐위되었으니 그 후로도 19년을 더 산 셈이지요.
또 등장한 미친 할아방
이런 이유로 미친 할아방은 탐라에 있게 된 것입니다.
시놉시스상 66세이고, 광해군은 1575년에 태어났으니 드라마는 1640년이나 1641년을 그리고 있을 겁니다.
서린의 계획
다시 '탐나는도다'로 돌아가서,
서린은 인조반정 때 부모를 잃고 겨우 살아남아 복수를 하려고 합니다.
(일요일 방송분에선 자신을 죽이려했던 하인을 찾아 죽였었죠.)
그런 꿈이 점점 커져 이제는 광해군을 왕으로 추대하여 탐라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국가를 세우려 하지요.
드라마에서 보면 미친 할아방은 이런 사실을 대충 알면서도, 이에 동조할 생각은 없는 듯 합니다.
이미 20년 가까이 한 유배생활로 정치적 야심은 거의 사라졌을테고,
정치적으로 동조해줄 대북파도 전멸한 상황이니 조선최고라지만 한낫 상단 하나로는 어찌할 상황이 아닐겝니다.
그리고 앞서말했듯 미친 할아방은 곧 천수를 다하게됩니다.
안타깝게도 서린의 꿈은 그저 꿈으로 끝날 듯 합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인조와 소현세자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소현세자는 광해군보다 더 비극적인 인물인데다
(아버지인 인조에게 온가족이 몰살당합니다..;;)
왕이 되지 못하고 죽은 세자 중에서는 사도세자와 함께
'왕이 되었다면 역사가 바뀌지 않았을까' 싶은 인물이기도 합니다.
(물론...역사에 가정은 없습니다..--;)
ps.
재미있는 건 광해군을 고 노무현 전대통령에 비교하는 견해가 많은 반면,
http://search.daum.net/search?nil_suggest=btn&nil_ch=&rtupcoll=&w=blog&m=&f=section&lpp=10&q=%B1%A4%C7%D8%B1%BA+%B3%EB%B9%AB%C7%F6
일부이긴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과 비슷하다는 견해도 있다는 것입니다.
http://search.daum.net/search?nil_suggest=btn&nil_ch=&rtupcoll=&w=blog&m=&f=section&lpp=10&q=%B1%A4%C7%D8%B1%BA+%C0%CC%B8%ED%B9%DA
개인적으로, 광해군을 현 대통령과 비교하는 건 광해군에게 치욕이라 봅니다.
지못미 광해군..ㅜ.ㅜ;
'한성별곡 - 正'은 조선시대의 마지막 황금기였던 정조시대,
정조말기의 정치적 격변기를 살아간 임금, 중인, 서얼, 그리고 노비를 통해 그들의 고뇌와 실패를 그려낸 드라마이다.
한성별곡은 기존의 사극과는 여러 점에서 다르다.
절대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보통의 사극은 영웅(절대선)의 일대기를 그리기위해 절대악을 등장시킨다.
주몽, 해신, 불멸의 이순신, 대장금, 정조 이산, 선덕여왕, 태왕사신기(얘는 사극이 아니라 판타지지만..) 등
최근 몇 년간 시청자를 사로잡은 사극에는 예외없이 절대악인 주연급 인물이 등장한다.
그리고 사극속 우리의 주인공들은 이런 절대악을 극복해가며 성장하여 승리하고, 결국 영웅이 된다.
'한성별곡'속 주연급에 절대악은 없다.
임금과 세 젊은이(중인, 서얼, 노비)는 각각 자신이 소망하는 꿈(正,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이 있고,
각자의 방법으로, 때로는 악한 수단까지 마다하지 않고 그 꿈을 위해 나아간다.
선(善)과 악(惡)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正)을 위해, 또는 자신 정이라 생각하는 것을 위해, 나아가다보면
선이 될 수도, 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현실에선 최선은 존재하지 않으며, 차선 또는 차악만이 존재한다.
그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몫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옳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서 방황하며 그들은 고뇌한다.
'이것이 과연 옳은 길인가, 옳은 방법인가?'
'한성별곡'은 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이런 고뇌를 잘보여주는 수작이었다.
(물론 현실은 '커피프린스 1호점'과 맞붙어 시청률은 박살이 났지만..;;)
그리고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고민 좀 하고 살라고, 자신을 돌아보고 살라고, 앞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을까 생각해보라고 역설한다.
(한성별곡 박진우 작가 인터뷰, http://blog.kbs.co.kr/kwarkjh/1663)
사전제작, 그것이 진리!
최근 종영한 MBC 드라마 '혼'은 명품드라마의 싹을 보여줬던 드라마가
사전제작하지 않아서 시망하게 된 아주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MBC 자체제작임에도 외주제작과 같은 출연진과 OST, 같은 소속사에 속한 조연급 연기자들의 엉성한 연기, 10부작임에도 중간에 바뀐 작가로 인해 끊긴 스토리의 연속성 등)
'한성별곡'은 반대로 사전제작을 하면 어떤 드라마를 볼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일단, 사전제작을 하니 극의 내용이 시청률에 따라 바뀌지 않고 일관성을 유지하였다.
이를 통해 탄탄한 구성과 연출, 그리고 치밀한 스토리가 가능했다.
(시청률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공영방송인 KBS 드라마의 힘이기도 하다.
그 덕에 부활, 마왕과 같은 명품 드라마가 탄생한 것이 아닐까?)
또, 사전제작을 통해 충분한 촬영시간이 보장되니 젊은 신인급 연기자들의 연기력 발전이 눈에 보였다.
서얼로 태어나 현실과 이상사이에서 고민하며 현실에 좌절한 박상규 역의 진이한.
참판의 딸로 선진문물과 사상을 접하고 높은 꿈을 꾸었던, 하지만 역도의 자식이 되어 다른 방법으로 꿈을 쫒은 이나영 역의 김하은.
양반이 아닌 자들을 위해 부를 쌓아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양만오 역의 이천희.
이 세 명의 신인급 연기자들은 극 초반 어색한 연기로 극에 대한 몰입을 방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충분한 시간이 약이 되었는지, 회를 거듭할 수록 안정된 연기력을 보여주더니 후반에는 어떤 흠도 없었다.
거기에 주조연급 중견연기자들은, 자신의 역할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연기가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었다.
그 중에서도 임금 역의 안내상의 연기는 발군이었다.
안내상 씨의 그런 연기는 작가, 감독과의 충분한 대화와 정조에 대한 충실한 사전연구를 바탕으로 이뤄졌는데,
(http://www.magazinet.co.kr/Articles/article_list.php?mm=002003000, 이 링크에서 안내상의 인터뷰를 보면 알 수 있는데,
아쉽게도 매거진넷은 2008년에 망했다..-_-; 그래서 지금은 저 링크를 클릭해도 인터뷰를 볼 수 없다는..;;)
이 역시도 사전제작을 통해 배우에게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작가 인터뷰 중...
- 안내상이 연기한 왕은 독특했다. 피곤하고, 불안했고, 조급해 보였다. 대본 쓸 당시 캐릭터는 어떻게 잡았나?
개인 내부의 복수심을 억누르려는 군주, 기득권에 대항해 자신의 개혁의지를 실행에 옮기려는 군주, 좌절하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군주, 이 정도가 대본 쓸 당시 캐릭터였다. 하지만 안내상씨는 대본 그 이상의 정조를 보여줬다. 그것은 대본을 뛰어넘는 배우의 개인 능력이 뿜어져 나온 것이라 생각하는데, ‘한성별곡’에서는 안내상씨를 비롯해 많은 분들이 연기란 무엇이다라고 몸소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현실을 반영한다.
작가의 말처럼, 역사 어느 때이건 돌이켜보면 언제나 현재와 유사한 점이 많다.
그 중에서도 정조시대는 현재와 특히 더 유사한데,
(이앙법의 보편화가 가져온 부의 편중과 그로 인한 양극화, 화성천도 시도와 기득권의 반발, 정치권의 심각한 갈등 등
- 작가 인터뷰 참조)
한성별곡은 아예 노골적으로 현실을 풍자해버렸다.
드라마 내에서도 그렇지만 티저예고 영상은 드라마를 통해 현실을 반영해보려는 제작의도를 대놓고 보여준다.
노무현 대통령께서 돌아가셨을 때,
김대중 대통령께서 '실천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고 역설하셨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이 이 드라마였다.
현실과 너무도 비슷해서...
소망하지 않는다면 어찌 얻을 수 있을까
애쓴만큼 얻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바로 나라의 녹을 먹는 우리가 해야할 일 이 아닙니까
그대로 두는 법을 안다면 그대로 두어라. 허나 그 법이 쉽지 않지
진실을 알고 싶습니다
알면....감당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것이 누구를 위한 미래란 말이오
조선의 백성들과 조선의 후손들을 휘한 미래입니다
어찌 희생하지 않고서 그 신념을 지켜낼 수 있겠습니까
두려움에 떤다면 어찌 모든 것을 걸 수 있겠습니까
나의 신념은 현실에 조롱당하고, 나의 꿈은 안타까운 희생을 키우는데...
포기하기 않는 나는 과연 옳은 것이냐...
마지막 소망, 내 나라 조선입니다.
소망하지 않으면, 희생하지 않으면 신념을 지켜낼 수 없다.
하지만 현실은...
소망하는 사람도, 희생하는 사람도 없고,
주위엔 온통 신념따윈 개나 줘버린 사람뿐이다...후...
ps.
'한성별곡'에서 모든 음모의 중심이었던 정순왕후 역의 정애리 씨는
채널CGV의 드라마 '정조암살미스테리 - 8일'에서는 그 대척점에 있던 혜경궁 홍씨의 역을 맡았다.
http://www.chcgv.com/special/8days/community/main.asp
전혀 다른 역할을 거의 같은 시기의 두 드라마에서 맡았던 정애리 씨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1999년 가을,
나우누리의 스포츠 게시판(나우 스게)에서 놀다가 알게 되어 처음 방문한 본격스포츠웹진 후추닷컴(www.hoochoo.com).
스포츠에 대한 열정이 보이는 깊이있는 글들과
서로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바탕으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자유게시판 후추통(現 누드게시판)은
수준낮은 논란으로 말싸움하기 일쑤이던 나우 스게와는 비교도 안되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그 중에서도,
인기종목의 평가절하 받던 선수나 크게 관심을 받지 못하는 비인기종목의 선수들을 재조명했던 '명예의 전당'은
후추의 색깔을 대표적으로 보여준 코너였다.
몇 페이지에 걸친 선수 인터뷰와 활약상, 그리고 재조명은 요즘에도 쉽게 볼 수 없다.
스포츠에 관한 독자분석, 비평 그리고 관전평을 쓰던 스포츠 자유게시판 독분비관은
기자나 전문가의 분석보다도 수준높은 분석글들이 넘쳐흘러서
아직 인터넷이 그리 활발하지 않던 시기에
스포츠에 관한 정보를 질낮은 스포츠신문에만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에게 깊이있는 분석을 보여주었더랬다.
(당시 독분비관에서 활약하던 독자와 후추기자들은 후추가 망한후(--;) 다른 스포츠관련 매체의 기자와 해설위원 등으로 활약
한다. 서형욱 축구해설위원이 대표적인 예.)
자금난과 주방장님(사이트 관리자로 이해하면 될듯)의 급작스런 미국유학으로 5년만에 폐쇄될 위기에 처했지만
독자들의 애정과 주방장님의 배려로 독분과 누드만은 남긴채로 2003년 폐간된다.
사이트가 망하면 사람들도 뿔뿔히 흩어져야 하는 것이거늘,
신기하게도 후추는 독분과 누드의 두 개의 게시판 만으로도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서버가 불안정한데다 외부 공격에 취약해서 한두달 정도 접속이 안되는 것은 예삿일인데도
후추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후추가 다시 돌아올 거라는 믿음을 갖고 꾸준히 방문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리고 독분비관에서 스포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누드게시판에서 연애, 음악, 영화, 옆집 강아지 집 나간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의 삶을 얘기한다.
그러면서도 (관리자가 없다시피 하는데도) 상대에 대한 예의와 배려를 잊지 않는다.
예의와 배려는 잊고 익명성이란 가면속에 숨어서 저글링 개떼같은 속성을 보이는 누리꾼들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후추라는 사이트는 보면 볼수록 신기한 곳이다.
오늘(9월 9일)로서 그런 후추가 열 번째 생일을 맞이했다.
후추를 보며, 웃고, 울며, 감동하며 10년을 보냈다.
10년 동안 후추가 있어 정말 행복했다. 축하한다 후추야~
p.s.
글솜씨도 떨어지는데다, 온라인 커뮤니티는 신기루와 같은 것이라 생각해서
블로그나 미니홈피같은 개인적인 공간을 제외하면 온라인 상에서 글쓰는 것을 극도로 자제하는 편이다.
그런데 후추에는 자연스럽게 글을 쓰고, 내 사는 이야기를 하고,
즐겁다고, 힘들다고, 세상에 분노했다고 편하게 얘길하곤 한다.
검색해보니 그런 글들이 4페이지 55개정도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참 신기한 곳이다. 후추란 곳...
혼의 매력, 그리고 남주인공 신류의 매력
인간은 누구나 이중적이다.
누구든지 선(善)과 악(惡)의 본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지만,
인간의 악한 본성은 사회적 도덕과 가치관에 의해 제재되며 동시에 선(善)을 지키려 노력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때때로 인간은 악해지기(이기적이 되기) 마련이다.
누군가가 자신이 가지고있는 것에 위해를 가져올 때, 또는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상황에 닥쳤을 때 등등...
'혼'의 신류는 인간의 이런 이중적인 모습을 아주 잘보여준다.
사회가 불법(여기서는 살인)을 저지른 인간을 법으로 처벌하지 못한 상황,
불법을 저지른 자가 법의 보호를 받는 모순된 상황에서
신류는 법을 초월하여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려 한다.
빙의된 하나를 이용하여 범죄자들을 죽이는 도덕적 살인.
죽어 마땅한 범죄자들을 응징하는 신류와 하나의 모습에서 시청자들은 심적으로 동조하게 되지만,
동시에 의문 또한 갖게된다.
도덕적 선(善)을 위해 행한 살인은 과연 선인가? 아니면 악인가?
법이 법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오로지 사회적 강자들을 위한 제도로서만 남아있는 대한민국의 상황에서
신류가 보여준 불법을 통한, 그리고 귀신을 이용한 단죄는 쾌감을 주는 동시에,
'과연 그것이 선인가? 아니면 악인가?'의 흥미로운 화두를 던져줬다.
이것이 바로 신류의 매력이자 드라마 '혼'의 매력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악마'가 되어가는 신류와 빙의되어 살인을 저질렀던 기억을 찾은 하나, '절대악'인 백도식(김갑수 분),
이들의 결말은 어찌될것인가?
아마도 이것이 몇 안되는 시청자들이 '혼'에 열광한 이유였을 것이다.(그리고 이 3인의 뛰어난 연기력!)
칭찬은 여기까지...
드라마 '혼'은 과감하게도 프롤로그에서 결말을 먼저 보여준다.
피묻힌 흰 원피스를 입고'내안에 악마가 있다'며 죽여달라는 하나와 눈물을 보이며 하나를 목조르던 신류,
그리고 하나를 늘 보호하던 시우의 분노...
여기에 제작진은 반전이 있다고 떡밥까지 투척한다.
http://www.heraldbiz.com/SITE/data/html_dir/2009/09/01/200909010771.asp
그런데 결말은...?
웬만하면 욕 안하는데('에덴의 동쪽'에서 송승헌이 하늘로 가는 어처구니 없는 엔딩을 보고도 참았다)
낚였다 ㅅㅂ;;
'밀폐된' 창고에서 미쳐날뛰며 자신을 죽이려는 아들을 살해하여 수감된 백도식이
뜬금없이 나타난 목격자에 의해 정당방위로 사면되는 9화때부터 눈치챘어야했다.
조금만 참으면 봐줄만 했던 시우의 연기가 9화 마지막에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수준까지 되었을 때 눈치챘어야했다.
10화는 흔한 '재연 드라마' 수준도 못되었다.
10년전 일요일 오전 sbs에서 하던 '반전드라마', 딱 그 수준. 아니 그만도 못했다.
5화-8화를 거치면서 느슨해지고 물음표를 던지더니,
9, 10화에선 반전드라마보다 못한 내용을 보여주고 프롤로그에서 보여준 결말과 전혀 다른 결말을 보여주었다.
정말 재미있는 웰메이드 드라마라고 주위에 추천하고 다녔던 내 입에서 발냄새가 나는 느낌이다.
회가 지날수록 같은 제작진이 만든 드라마가 맞는지 의심스러운 이 드라마...
도대체 이유가 뭔지 궁금하다.
사전제작이 아니라 시간에 쫒겨서?
출연진 다수가 포진한 제작사의 압력때문에?
다른 건 모르겠고,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혼'이 드라마면 파리가 새다.
p.s. 개인적인 추측이 있긴하지만 그걸 쓰는 건 좀 위험하니 사실인 것들만 몇 가지 적는다.
(사실관계로부터 추측은 개인의 자유니깐...)
연기력에서 문제를 보인 출연진들(이혜원 역의 이진, 윤두나 역의 지연, 정시우 역의 박건일, 그리고 신류 여동생역의 보람)은
모두 다 그 유명한 김광수 사장의 코어콘텐츠미디어 소속이다.(지연과 보람은 티아라, 박건일은 초신성)
2. 드라마의 OST인 '령혼'을 부른 양파 역시 같은 소속사다.
3. 드라마를 코믹으로 만든 엔딩송 '거짓말'의 티아라는 요즘 엠넷을 틀면 매우 자주 볼 수 있다.
(티아라의 소속사인 코어콘텐츠미디어는 엠넷과 관계가 있다)
http://news.mk.co.kr/outside/view.php?year=2008&no=735205
4. '혼'은 자체제작 드라마라, 매우 저예산의 드라마다.
http://spn.edaily.co.kr/entertain/newsRead.asp?sub_cd=EA31&newsid=01161126589786008&DirCode=0010301
http://news.hankooki.com/lpage/sports/200908/h2009080506354091970.htm
5.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