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나는도다' 어렵게 보기 - (2) 인조는 왜 소현세자를 죽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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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글:  탐나는도다' 어렵게 보기 - (1) 미친 할아방은 왜 제주도에 있을까?



지난번 글에서는
'미친 할아방이 왜 임금의 자리에서 쫒겨나 제주도에서 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적었었습니다.



바로 이분 얘기였었죠.


오늘의 이야기는 '인조는 왜 소현세자를 죽였는가?'입니다.


사실 인조가 소현세자를 죽였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습니다.
정황상 그랬을 것이라 설을 제기하는 학자들이 있는 정도죠.
그럼에도 저런 자극적인 제목을 붙힌 것은 그저 조회수를 올려보려는 수작입니다..;;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어제(13회)의 결정적 장면을 몇 가지 보고 넘어갑니다.
이 중 일부는 오늘의 주제와 관련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고,
일부는 버진이와 박규 도령의 눈물이 너무도 아파서 이들을 아끼는 마음에 한 번 더 보고자 하는 개인적인 이유입니다.



결정적 장면 1.





"귀양다리 너만 아니었음, 너만 아니었음... 나는 벌써 일리암이랑 떠났을꺼라.
왜 내앞에 나타나서 왜 내인생을 망치나? 왜?
귀양다리 니가 싫다."


이 장면이 너무도 가슴 아팠던 것은 버진의 눈물때문이 아니라
사랑하면서도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아파하는 모습을 그저 보기만 해야하는 귀양다리의 모습이 너무도 안쓰럽고 공감됐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버진이가 웃어주는 모습을 귀양다리는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요...
(일리암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관계로) 귀양다리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버진이가 너무 야속했습니다.


(이 장면에서는 배경음악이 아주 잘 어울렸었는데요, 가사가 딱 귀양다리의 심정이었습니다.
이 곡은 하울의 '그저 말하고 싶어'입니다.
http://www.imbc.com/broad/tv/drama/tamra/ost/index.html
조용한 기타 선율에서 성시경의 명곡인 '두사람'과 비슷한 분위기가 느껴지더군요.)



결정적 장면 2.





같은 이유로 일리암을 구해내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귀양다리의 눈물도,
강제로라도 버진의 마음을 가져보려던 귀양다리의 행동도 참 많이 공감 갔습니다.
(물론 두 번째 행동은 나쁜 짓입니다만..쿨럭..;;)


그나저나 비단 옷을 입은 버진은 너무 귀엽고 예쁘더군요. 반할 뻔 했습니다.





이외의 결정적 장면은 인조와 소현세자의 이야기를 하면서 기회를 봐서 껴넣겠습니다.
여기서 더 길어지면 주제와 다르게 '탐나는도다 13화 감상기'가 될 것 같거든요.


이번 이야기도 이 전과 마찬가지로 쓸데없이 길기만 하고 재미없는 글이 될 것이라 생각하기에,
역사에 관심없는 분들은 주저없이 백스페이스를 누르시기 바랍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지난번 이야기가 '광해군이 태어나 왕위에 오르고 폐위되어 제주도까지 가게된 기구한 사정'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이번 이야기는 '인조가 왕위에 오른 후 의심많은 인물이 되어가는 과정과 결국 아들인 소현세자와 그 일가를 죽음으로 몰고가게 된 과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인조와 그의 아들 소현세자




이괄의 난


건국이건 반정이건, 어떠한 이유에서 정통성이 없는 새로운 왕이 세워지면
이 과정에서 공을 세운 신하들에 대한 논공행상이 이루어지기 마련입니다.
반정 직후에는 반정 공신들의 위세가 왕권보다 강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논공행상을 통해서 새롭게 새워진 왕실의 안정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인조반정에 성공한 이후에도 역시 논공행상이 펼쳐집니다.


이괄은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기 직전 광해군에 의해 북병사로 임명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괄은 임지로 부임하지 않고 반정에 가담해버렸습니다.
반정군의 대장은 김류였지만, 실질적으로 반정군을 지휘한 것은 이괄이었습니다.


이괄이 없었다면 인조반정은 반정(反正)이 아니라
조선시대의 수많은 반란 중 하나가 될 뻔 했습니다.
이괄의 결단력으로 성공했으니 반정이지, 실패했다면 그저 쿠테타, 반란에 불과할 것이란 얘기입니다.


실제로 반정 전날, 대장 김류는 정보가 새어나갔다는 소식을 듣고 거사장소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집에서 근신하고 있었죠. 반란과 자신의 무관함을 보이기 위한 행위였습니다.
김류는 이괄이 대신 군사를 움직이자 그제서야 반정에 합류하죠.


인조반정에서 이렇게 큰 공을 세웠음에도 이괄은 이등공신에 책정되었습니다. 김류는 일등공신.
반정 다음날 이괄은 김류의 행위를 노골적으로 비난하였는데,
이는 서인들이 이괄을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거기에 그는 평안도병마절도사 겸 부원수로 임명되어 외직으로 축출되기도 하였습니다.
인조와 서인의 입장에서는 후금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 그와 같은 용맹한 장수가 필요한 것이었지만,
이괄의 입장에서는 일등공신으로 책정도 받지 못하고 외직으로 축출된 것과 같이 느껴졌을겁니다.


거기에다 문회, 이우 두 사람은 이괄을 역모혐의로 밀고합니다.
인조는 이괄을 잡아오라고 금부도사를 보내지만, 격노한 이괄은 오히려 이들을 죽이고 병사를 모아 서울로 진격합니다.
이에 인조는 위협을 느끼고 공주로 도망갑니다.
이괄은 19일만에 서울을 함락시키고 선조의 아들 흥안군을 임금으로 옹립하여 새로운 정권을 세웁니다.
그러나 이괄은 전열을 정비해 공격해온 관군에게 대패하고 이천으로 도망갔다가
부하들에 의해 목이 베어지고 반란은 평정됩니다.


이괄의 난은 인조정권이 기반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였습니다.
주요한 반정공신에게 단 19일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인조가 서울을 떠나자마자 대부분의 인물들이 이괄에게 투항한 것은
인조가 자신의 권력기반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깨닫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괄의 난은 후에 정묘호란이 일어나게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평안도를 지키던 이괄이 군대를 일으키면서 북방의 경비가 소홀해지기도 했고,
이괄의 난 이후, 서인들의 감시에 역모로 의심받을 것을 두려워한 지방 무관들은 군사훈련을 자제하여 군사들의 훈련이 크게 부족해졌으며,
이괄의 난의 주요 인물인 한윤이 후금으로 넘어가 인조의 친명배금 정책을 알려 후금이 조선을 치게되는 빌미를 주기도 했습니다.



인조는 이괄의 난을 겪으며 자신의 권력기반이 얼마나 약한지 깨닫게 되었을 겁니다.



그리고 1627년 정묘호란을 당한 후에도 반란 기도와 역모사건은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1624년 '이괄의 난' 이후, 1627년 '이인거의 역모사건', 1628년 '유효립의 역모사건', 1629년 '이충경의 난'이 발생하였습니다.
유효립은 광해군의 복위를 내세웠고, 이충경은 아예 조선과는 다른 새로운 사회 건설을 표방했습니다.



이런 끝모를 역모와 반란, 그리고 정묘호란을 겪으며 인조는 점점 의심이 많은 인물이 되어갑니다.

 

그리고 1636년 병자호란이 발생하여, 인조는 그 유명한 삼전도의 치욕을 당합니다.

 


삼전도의 치욕

 
1637년 청 태종에게 항복한 인조는 남한산성을 내려와 죄인임을 나타내기 위해 가시 박힌 자리에 앉아 대죄했습니다.
인조는 청나라 장수들의 인도를 받아 삼전도(지금의 송파구)에 가서 삼배구고두를 행합니다.
삼배구고두란 세 번 절하고 절할 때 마다 세 번씩 땅에 머리를 조아리는 것을 말합니다.
삼배구고두의 예를 행하면서 인조의 머리에는 피가 났다고 하는데, 정말 치욕스럽기 그지 없는 일이었습니다.




삼전도비
http://www.songpa.go.kr/user.kdf?a=songpa.menu.MenuApp&c=1001&cate_id=BB1205002010



치욕스러운 일이었지만 이는 인조가 자처한 일이었습니다.
후금(청)의 세력을 우려했다면,
군사력을 증강시켜 그들의 침입에 대처하는 한편, 그들을 다독이는 외교책을 취했어야 하는데 인조는 둘 다 하지 못하였습니다.


명을 치려는 후금의 입장에서 배후에서 위협하는 조선은 눈의 가시였을 겁니다.
이에 후금은 정묘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치지만,
이 때는 아직 명군의 견제도 생각해야 하기에 조선과 적당히 화의를 맺고 물러갑니다.
하지만 조선은 이후에도 전과 다름없는 외교정책을 취합니다.
이에 청은 조선을 더욱 강하게 압박할 필요를 느껴 병자호란을 일으킵니다.


생각이 있다면
군사력을 강화하던가, 중립외교를 펼치던가 해야하는데
인조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가 치욕을 당한 것이었죠.

광해군과는 전혀 다른 방식을 택해 결국 자신이 치욕을 자초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햄릿의 클로어디스와 인조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가운데 하나인 '햄릿'(http://100.naver.com/100.nhn?docid=188152)에서
클로어디스는 사랑과 권력을 얻기위해 왕이었던 자신의 형을 독살하고 왕위에 오릅니다.
일리암은 이 이야기를 인형극으로 꾸며 인조에게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전 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인조 역시 그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왕위에 오른 인물입니다.
인조는 군사를 일으켜 삼촌뻘인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임금이 된 인물이었습니다.
일리암의 인형극은 한마디로 '분위기 파악 못하는 정신나간 짓'이었습니다.
인형극을 지켜보며 점차 일그러지는 대신들과 인조의 얼굴이 이를 말하고 있죠.


"아 그깟 왕이 무엇이길래?
형제를 죽이면서까지 그 자리에 올랐단 말인가?"


라고 말하는 일리암의 대사는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인조에게 인형극을 보여주기 전에 박연(로버트 할리)에게라도 먼저 한번 보여주었다면,
상황을 저렇게 파국으로 몰아가지는 않았겠죠.


('탐나는도다'를 보면 일리암 얘는 줄곧 이런 분위기 파악 못하는 짓을 자주합니다.
조선의 물정을 모르는 이방인임을 고려해도 얘는 좀 심하죠.

오늘(14화) 방송분에서는 박규가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고 생각하더군요.
조금만 생각해보면 박규가 자신을 구하려고 한 행동임을 알 수 있었을텐데 말이죠.

좋게 말하면 순수한 거고, 나쁘게 말하면 개념이 없는 것인데,
어쨌든 그래서 저는 일리암이 별로 마음에 안듭니다.
전 별로 순수하지 않거든요..;;)







청에 볼모로 끌려가는 소현세자


병자호란의 결과로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 봉림대군(후의 효종)과 대군부인 장씨는 청의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게 됩니다.


소현세자가 비록 청에 볼모로 잡혀가는 치욕을 당했지만,
이는 역으로 당시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읽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됩니다.


명청이 교체되는 시기를 현장에서 목도한 소현세자는
명은 더이상 사대할 국가가 아니라 이미 지는 해였으며,
중원의 중심은 명이 아닌 청으로 기울었음을 직접 확인하게 됩니다.


이즈음 소현세자는 새로운 사상과 문물을 접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인물을 만납니다.
바로 선교사 아담 샬입니다.(http://100.naver.com/100.nhn?docid=104145)
아담 샬은 해박한 과학 지식을 바탕으로 명에서 역서와 대포를 주조하는 일을 맡았었고,
청이 중원을 장악한 후에도 천문대장을 맡아 시헌력을 만든 인물입니다.


아담 샬과 소현세자의 숙소는 가까운 곳에 있어 둘은 자주 만나 친분을 쌓았다고 합니다.
소현세자에게 아담 샬은 새로운 사상과 문물을 접할 수 있는 기회였고
아담 샬에게 소현세자 역시 조선에 천주교를 전파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 외에도 조국이 아닌 이국땅에서 생활하는 서로의 처지가 서로를 깊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기도 할테죠.
소현세자는 그에게 천문서적, 과학서적, 천구의 등을 선물받아 새로운 문물을 접합니다.


어쨌든 소현세자는 북경에서 새로운 사상(천주교)과 새로운 문물을 접하며 개방적인 사고를 가진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의 개방적 사고는 '탐나는도다' 13화의 첫부분에도 등장합니다.



서린과 만나는 소현세자


서린이 "농사보다 훨씬 이익을 취할 수 있는 기술과 장사를 지나치게 천대한 것이 문제"라 얘기하자
소현세자는 이에 동의하며 청과의 교역확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에 서린은 다시 "일본의 대지마가 개항을 통해 많은 이득을 취하였다며 조선도 개항만 한다면 많은 이득을 취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합니다.




여기서 박규는 "무분별한 개항은 독이 될 수 있다"며 딴지를 겁니다.

서린과 박규의 갈등을 풀어갈 앞으로의 이야기가 궁금한데, '탐나는도다'는 앞으로 2회분만이 남았습니다..;;
아직 해야할 얘기가 많을 듯 한데 20부작이 16부작으로 축소되는 바람에 이야기 진행이 허술해지지나 않을 지 걱정입니다
.


 


다시 소현세자로 넘어와서,



서양문물과 사상에 거부감이 없는 개방적인 사고를 가진 소현세자가 왕위에 올랐다면,
조선은 틀에박힌 성리학에서 벗어나 새롭게 발전해 나갈 수도 있었을 겁니다.
물론 사대부들의 거센 반발로 소현세자가 꿈꾸던 세상은 좌초할 가능성이 높았지만,


'최소한 그가 임진왜란 이후 이미 망해버린 것과 마찬가지인 조선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하지만 역사에서 가정은 부질없는 짓일 뿐이고,


소현세자는 청에 볼모로 잡혀간 지 9년만에 귀국하지만, 귀국 두 달만에 병에 걸려 죽고맙니다.


타국의 9년 생활도 견뎌낸 30대의 건장한 청년이 귀국하자마자 병에 걸려 죽은 것도 이상한데다,
그의 사체에서는 독살의 흔적이 역력했기에
의심의 눈초리는 소현세자를 의심했던 인조에게 넘어갑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인조가 소현세자를 독살했다는 명확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면 인조는 왜 소현세자를 의심하게 되었을까요?




소현세자를 의심하게 된 인조
 

'이괄의 난' 이후 끊임없이 이어지는 반란과 역모에 인조가 의심이 많아졌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설명했습니다.


그러면 왜 인조는 자신의 아들인 소현세자까지 의심하게 되었을까요?


소현세자가 청에 볼모로 잡혀간지 3년째인 1640년,
조선은 인조의 병을 이유로 소현세자의 일시 귀국을 청에 청합니다.
이에 청은 인조의 3남 인평대군과 소현세자의 장남인 원손 석철을 심양으로 불러들인 후에야
소현세자의 귀국을 허락합니다.


소현세자가 귀국하기 전 청 태종은 직접 세자의 환송연을 열어주며
세자에게 안장을 한 말과 대홍망룡의를 선물하며 입으라고 권합니다.


이 대홍망룡의가 문제였습니다.
대홍망룡의는 한나라의 국왕이 입는 옷으로 세자가 입는다는 것은 인조에게 큰 실수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소현세자는 '국왕의 장복'이라며 거절하였으며 청태종도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던 신득연이 이를 조선에 알렸고
조선에는 '세자가 대홍망룡의를 입고 춤을 추었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이 사건은 과거 임진왜란 때 명이 선조를 무시하고 광해군을 왕처럼 대했던 것처럼,
청 역시도 자신을 폐하고 소현세자를 왕으로 세우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인조가 하게 된 계기가 됩니다.


인조는 먼저 나가 귀국하는 세자를 마중하겠다는 세자시강원(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관청) 관원들의 청을 묵살했으며,
어의를 보내자는 내의원의 청 역시 거부하였습니다.
그리고 세자를 맞이 하는 의식을 모두 폐지시켜버립니다.


 
 

 
따라서, '탐나는도다' 11화에서 보여주는 소현세자의 일시 귀국을 축하하는 이 연회장면은 실제로는 없었을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연회장면에서는 앞서 설명한 '소현세자에 대한 인조의 의심'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소현세자에게 술을 권하는 인조



인조는 저렇듯 거칠게 술을 따른 후 말합니다.



 "왕의 자리가 그렇게도 탐이 나더냐?
 이 애비가 언제 죽을지 알아보러 온 것이겠지.
 청황제를 등에 업고 이 나라를 차지해 바칠 심산이냐?"






인조 뿐만 아니라, 반청을 기치로 인조반정에 성공한 서인들에게
소현세자의 개방적인 태도는 부담스러웠을 겁니다.


어쨌든...인조는 이후 소현세자를 끊임없이 의심합니다.
그리고 청에 볼모로 간지 9년만에 소현세자는 영구 귀국합니다.




소현세자와 그 가족들의 비극적 최후
 

영구 귀국한 소현세자는 두 달만인 1645년 4월 26일에 급사합니다.
소현세자가 4월 23일 병석에 누운 이유는 학질이었습니다.
이에 어의 이형익이 세자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침을 놓았는데, 세자는 3일만에 세상을 떠납니다.


원래 조선에서는 왕이나 세자가 죽게되면 치료를 한 시의를 국문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런데 인조는 어의 이형익을 옹호하며 국문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형익은 원래 인조의 후궁인 소용 조씨의 사가에 출입하던 의원이었는데 그녀의 추천으로 어의가 된 인물이었는데,
소용 조씨는 세자와 관계가 매우 안좋은 인물이었습니다.
거기에 인조실록에는 "세자가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라는 말까지 적혀있습니다.
또한 인조는 소현세자의 장례절차 역시 최대한 간소화 시켜버렸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들로 인해 인조가 소현세자의 죽음에 관련이 있다는 의심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인조는 소현세자의 가족들에게 손을 뻗히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인조는 세손이 되어야 할 소현세자의 아들 석철이 어리다는 이유로 무시하고,
소현세자의 동생 봉림대군(후의 효종)을 세자로 책봉합니다.


이제 인조는 청과 결탁하여 자신을 몰아내고 세자를 세우려 했다는 의심으로 세자빈 강씨를 압박합니다.
인형이나 동물을 마당이나 베갯속에 묻어두고 상대방을 저주하는 사건이나 음식에 독을 넣는 사건을 벌여 그 죄를 세자빈 강씨에게 돌렸습니다.
강씨를 죽이라는 인조의 명령에 신하들은 강하게 반대하였지만,
결국 인조는 세자빈 강씨를 쫒아낸 후 사약을 먹게 해 죽여버립니다.


그 후 인조는 세자빈 강씨의 어머니를 처형하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 즉 자신의 친손자 셋을 제주도로 유배를 보내버립니다.
세손이 되어야 마땅했을 석철은 다음해 9월에 제주도에서 사망합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 석린 역시 석달 후 죽고 맙니다.
실록에는 풍토병으로 기록되었지만 이들의 죽음에도 의구심은 남아있습니다.


소현세자가 죽은 후 청나라 장수 용골대는 석철을 자신이 데려다 키우겠다고 말했었는데,
인조는 청에서 석철을 키워 인조를 폐위시키고 석철을 왕으로 세울 것이라 의심했습니다.
인조로써는 석철을 죽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죠.


어쨌든 소현세자 일가는 광해군 일가와 비슷하게 이렇듯 안타까운 최후를 당합니다.




마지막으로...


탁월한 중립외교와 군사력 강화: 광해군
친명배금 정책과 군사력 도외시: 인조


여기서 왠지 지난 대통령과 현 대통령이 느껴지시지 않나요?


군대를 다녀온 대통령과 안 다녀온 대통령,


밀리터리 매니아로 널리 알려지고 국방력 강화를 위해 국방비를 증강시키고 국방개혁안을 만든 대통령과
그 국방개혁안을 후퇴시킨 대통령,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90601006006


최신 정찰기인 글로벌 호크를 도입하여 정보력을 강화시키려 했던 그러나 미국의 반대로 아쉽게 실패한 대통령과
미국이 뒤늦게 팔겠다는데도 안사겠다는 대통령,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5/23/2009052300056.html


북한을 다독이며 미국에도 할말을 했던 대통령과 미국만 쳐다보는데 정작 미국에도 무시당하는 대통령
http://media.daum.net/politics/north/view.html?cateid=1019&newsid=20090609103112602&p=viewsn


여러모에서 광해군과 인조는 전 대통령과 현 대통령이 떠오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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