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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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9.15 '탐나는도다' 어렵게 보기 - (1) 미친 할아방은 왜 제주도에 있을까? 6
- 2009.09.09 한성별곡 - 正
- 2009.08.26 미륵사지 석탑의 복원은 왜 계속 늦춰지는 것일까? 2
- 2009.03.22 조선시대의 섹스스캔들, 감동과 어우동
관련글: 탐나는도다' 어렵게 보기 - (1) 미친 할아방은 왜 제주도에 있을까?
지난번 글에서는
'미친 할아방이 왜 임금의 자리에서 쫒겨나 제주도에서 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적었었습니다.
바로 이분 얘기였었죠.
오늘의 이야기는 '인조는 왜 소현세자를 죽였는가?'입니다.
사실 인조가 소현세자를 죽였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습니다.
정황상 그랬을 것이라 설을 제기하는 학자들이 있는 정도죠.
그럼에도 저런 자극적인 제목을 붙힌 것은 그저 조회수를 올려보려는 수작입니다..;;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어제(13회)의 결정적 장면을 몇 가지 보고 넘어갑니다.
이 중 일부는 오늘의 주제와 관련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고,
일부는 버진이와 박규 도령의 눈물이 너무도 아파서 이들을 아끼는 마음에 한 번 더 보고자 하는 개인적인 이유입니다.
결정적 장면 1.
"귀양다리 너만 아니었음, 너만 아니었음... 나는 벌써 일리암이랑 떠났을꺼라.
왜 내앞에 나타나서 왜 내인생을 망치나? 왜?
귀양다리 니가 싫다."
이 장면이 너무도 가슴 아팠던 것은 버진의 눈물때문이 아니라
사랑하면서도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아파하는 모습을 그저 보기만 해야하는 귀양다리의 모습이 너무도 안쓰럽고 공감됐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버진이가 웃어주는 모습을 귀양다리는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요...
(일리암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관계로) 귀양다리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버진이가 너무 야속했습니다.
(이 장면에서는 배경음악이 아주 잘 어울렸었는데요, 가사가 딱 귀양다리의 심정이었습니다.
이 곡은 하울의 '그저 말하고 싶어'입니다.
http://www.imbc.com/broad/tv/drama/tamra/ost/index.html
조용한 기타 선율에서 성시경의 명곡인 '두사람'과 비슷한 분위기가 느껴지더군요.)
결정적 장면 2.
같은 이유로 일리암을 구해내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귀양다리의 눈물도,
강제로라도 버진의 마음을 가져보려던 귀양다리의 행동도 참 많이 공감 갔습니다.
(물론 두 번째 행동은 나쁜 짓입니다만..쿨럭..;;)
그나저나 비단 옷을 입은 버진은 너무 귀엽고 예쁘더군요. 반할 뻔 했습니다.
이외의 결정적 장면은 인조와 소현세자의 이야기를 하면서 기회를 봐서 껴넣겠습니다.
여기서 더 길어지면 주제와 다르게 '탐나는도다 13화 감상기'가 될 것 같거든요.
이번 이야기도 이 전과 마찬가지로 쓸데없이 길기만 하고 재미없는 글이 될 것이라 생각하기에,
역사에 관심없는 분들은 주저없이 백스페이스를 누르시기 바랍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지난번 이야기가 '광해군이 태어나 왕위에 오르고 폐위되어 제주도까지 가게된 기구한 사정'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이번 이야기는 '인조가 왕위에 오른 후 의심많은 인물이 되어가는 과정과 결국 아들인 소현세자와 그 일가를 죽음으로 몰고가게 된 과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인조와 그의 아들 소현세자
이괄의 난
건국이건 반정이건, 어떠한 이유에서 정통성이 없는 새로운 왕이 세워지면
이 과정에서 공을 세운 신하들에 대한 논공행상이 이루어지기 마련입니다.
반정 직후에는 반정 공신들의 위세가 왕권보다 강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논공행상을 통해서 새롭게 새워진 왕실의 안정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인조반정에 성공한 이후에도 역시 논공행상이 펼쳐집니다.
이괄은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기 직전 광해군에 의해 북병사로 임명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괄은 임지로 부임하지 않고 반정에 가담해버렸습니다.
반정군의 대장은 김류였지만, 실질적으로 반정군을 지휘한 것은 이괄이었습니다.
이괄이 없었다면 인조반정은 반정(反正)이 아니라
조선시대의 수많은 반란 중 하나가 될 뻔 했습니다.
이괄의 결단력으로 성공했으니 반정이지, 실패했다면 그저 쿠테타, 반란에 불과할 것이란 얘기입니다.
실제로 반정 전날, 대장 김류는 정보가 새어나갔다는 소식을 듣고 거사장소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집에서 근신하고 있었죠. 반란과 자신의 무관함을 보이기 위한 행위였습니다.
김류는 이괄이 대신 군사를 움직이자 그제서야 반정에 합류하죠.
인조반정에서 이렇게 큰 공을 세웠음에도 이괄은 이등공신에 책정되었습니다. 김류는 일등공신.
반정 다음날 이괄은 김류의 행위를 노골적으로 비난하였는데,
이는 서인들이 이괄을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거기에 그는 평안도병마절도사 겸 부원수로 임명되어 외직으로 축출되기도 하였습니다.
인조와 서인의 입장에서는 후금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 그와 같은 용맹한 장수가 필요한 것이었지만,
이괄의 입장에서는 일등공신으로 책정도 받지 못하고 외직으로 축출된 것과 같이 느껴졌을겁니다.
거기에다 문회, 이우 두 사람은 이괄을 역모혐의로 밀고합니다.
인조는 이괄을 잡아오라고 금부도사를 보내지만, 격노한 이괄은 오히려 이들을 죽이고 병사를 모아 서울로 진격합니다.
이에 인조는 위협을 느끼고 공주로 도망갑니다.
이괄은 19일만에 서울을 함락시키고 선조의 아들 흥안군을 임금으로 옹립하여 새로운 정권을 세웁니다.
그러나 이괄은 전열을 정비해 공격해온 관군에게 대패하고 이천으로 도망갔다가
부하들에 의해 목이 베어지고 반란은 평정됩니다.
이괄의 난은 인조정권이 기반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였습니다.
주요한 반정공신에게 단 19일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인조가 서울을 떠나자마자 대부분의 인물들이 이괄에게 투항한 것은
인조가 자신의 권력기반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깨닫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괄의 난은 후에 정묘호란이 일어나게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평안도를 지키던 이괄이 군대를 일으키면서 북방의 경비가 소홀해지기도 했고,
이괄의 난 이후, 서인들의 감시에 역모로 의심받을 것을 두려워한 지방 무관들은 군사훈련을 자제하여 군사들의 훈련이 크게 부족해졌으며,
이괄의 난의 주요 인물인 한윤이 후금으로 넘어가 인조의 친명배금 정책을 알려 후금이 조선을 치게되는 빌미를 주기도 했습니다.
인조는 이괄의 난을 겪으며 자신의 권력기반이 얼마나 약한지 깨닫게 되었을 겁니다.
그리고 1627년 정묘호란을 당한 후에도 반란 기도와 역모사건은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1624년 '이괄의 난' 이후, 1627년 '이인거의 역모사건', 1628년 '유효립의 역모사건', 1629년 '이충경의 난'이 발생하였습니다.
유효립은 광해군의 복위를 내세웠고, 이충경은 아예 조선과는 다른 새로운 사회 건설을 표방했습니다.
이런 끝모를 역모와 반란, 그리고 정묘호란을 겪으며 인조는 점점 의심이 많은 인물이 되어갑니다.
그리고 1636년 병자호란이 발생하여, 인조는 그 유명한 삼전도의 치욕을 당합니다.
삼전도의 치욕
1637년 청 태종에게 항복한 인조는 남한산성을 내려와 죄인임을 나타내기 위해 가시 박힌 자리에 앉아 대죄했습니다.
인조는 청나라 장수들의 인도를 받아 삼전도(지금의 송파구)에 가서 삼배구고두를 행합니다.
삼배구고두란 세 번 절하고 절할 때 마다 세 번씩 땅에 머리를 조아리는 것을 말합니다.
삼배구고두의 예를 행하면서 인조의 머리에는 피가 났다고 하는데, 정말 치욕스럽기 그지 없는 일이었습니다.
삼전도비
http://www.songpa.go.kr/user.kdf?a=songpa.menu.MenuApp&c=1001&cate_id=BB1205002010
치욕스러운 일이었지만 이는 인조가 자처한 일이었습니다.
후금(청)의 세력을 우려했다면,
군사력을 증강시켜 그들의 침입에 대처하는 한편, 그들을 다독이는 외교책을 취했어야 하는데 인조는 둘 다 하지 못하였습니다.
명을 치려는 후금의 입장에서 배후에서 위협하는 조선은 눈의 가시였을 겁니다.
이에 후금은 정묘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치지만,
이 때는 아직 명군의 견제도 생각해야 하기에 조선과 적당히 화의를 맺고 물러갑니다.
하지만 조선은 이후에도 전과 다름없는 외교정책을 취합니다.
이에 청은 조선을 더욱 강하게 압박할 필요를 느껴 병자호란을 일으킵니다.
생각이 있다면
군사력을 강화하던가, 중립외교를 펼치던가 해야하는데
인조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가 치욕을 당한 것이었죠.
광해군과는 전혀 다른 방식을 택해 결국 자신이 치욕을 자초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가운데 하나인 '햄릿'(http://100.naver.com/100.nhn?docid=188152)에서
클로어디스는 사랑과 권력을 얻기위해 왕이었던 자신의 형을 독살하고 왕위에 오릅니다.
일리암은 이 이야기를 인형극으로 꾸며 인조에게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전 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인조 역시 그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왕위에 오른 인물입니다.
인조는 군사를 일으켜 삼촌뻘인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임금이 된 인물이었습니다.
일리암의 인형극은 한마디로 '분위기 파악 못하는 정신나간 짓'이었습니다.
인형극을 지켜보며 점차 일그러지는 대신들과 인조의 얼굴이 이를 말하고 있죠.
"아 그깟 왕이 무엇이길래?
형제를 죽이면서까지 그 자리에 올랐단 말인가?"
라고 말하는 일리암의 대사는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인조에게 인형극을 보여주기 전에 박연(로버트 할리)에게라도 먼저 한번 보여주었다면,
상황을 저렇게 파국으로 몰아가지는 않았겠죠.
('탐나는도다'를 보면 일리암 얘는 줄곧 이런 분위기 파악 못하는 짓을 자주합니다.
조선의 물정을 모르는 이방인임을 고려해도 얘는 좀 심하죠.
오늘(14화) 방송분에서는 박규가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고 생각하더군요.
조금만 생각해보면 박규가 자신을 구하려고 한 행동임을 알 수 있었을텐데 말이죠.
좋게 말하면 순수한 거고, 나쁘게 말하면 개념이 없는 것인데,
어쨌든 그래서 저는 일리암이 별로 마음에 안듭니다.
전 별로 순수하지 않거든요..;;)
청에 볼모로 끌려가는 소현세자
병자호란의 결과로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 봉림대군(후의 효종)과 대군부인 장씨는 청의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게 됩니다.
소현세자가 비록 청에 볼모로 잡혀가는 치욕을 당했지만,
이는 역으로 당시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읽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됩니다.
명청이 교체되는 시기를 현장에서 목도한 소현세자는
명은 더이상 사대할 국가가 아니라 이미 지는 해였으며,
중원의 중심은 명이 아닌 청으로 기울었음을 직접 확인하게 됩니다.
이즈음 소현세자는 새로운 사상과 문물을 접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인물을 만납니다.
바로 선교사 아담 샬입니다.(http://100.naver.com/100.nhn?docid=104145)
아담 샬은 해박한 과학 지식을 바탕으로 명에서 역서와 대포를 주조하는 일을 맡았었고,
청이 중원을 장악한 후에도 천문대장을 맡아 시헌력을 만든 인물입니다.
아담 샬과 소현세자의 숙소는 가까운 곳에 있어 둘은 자주 만나 친분을 쌓았다고 합니다.
소현세자에게 아담 샬은 새로운 사상과 문물을 접할 수 있는 기회였고
아담 샬에게 소현세자 역시 조선에 천주교를 전파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 외에도 조국이 아닌 이국땅에서 생활하는 서로의 처지가 서로를 깊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기도 할테죠.
소현세자는 그에게 천문서적, 과학서적, 천구의 등을 선물받아 새로운 문물을 접합니다.
어쨌든 소현세자는 북경에서 새로운 사상(천주교)과 새로운 문물을 접하며 개방적인 사고를 가진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의 개방적 사고는 '탐나는도다' 13화의 첫부분에도 등장합니다.
서린과 만나는 소현세자
서린이 "농사보다 훨씬 이익을 취할 수 있는 기술과 장사를 지나치게 천대한 것이 문제"라 얘기하자
소현세자는 이에 동의하며 청과의 교역확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에 서린은 다시 "일본의 대지마가 개항을 통해 많은 이득을 취하였다며 조선도 개항만 한다면 많은 이득을 취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합니다.
여기서 박규는 "무분별한 개항은 독이 될 수 있다"며 딴지를 겁니다.
서린과 박규의 갈등을 풀어갈 앞으로의 이야기가 궁금한데, '탐나는도다'는 앞으로 2회분만이 남았습니다..;;
아직 해야할 얘기가 많을 듯 한데 20부작이 16부작으로 축소되는 바람에 이야기 진행이 허술해지지나 않을 지 걱정입니다.
다시 소현세자로 넘어와서,
서양문물과 사상에 거부감이 없는 개방적인 사고를 가진 소현세자가 왕위에 올랐다면,
조선은 틀에박힌 성리학에서 벗어나 새롭게 발전해 나갈 수도 있었을 겁니다.
물론 사대부들의 거센 반발로 소현세자가 꿈꾸던 세상은 좌초할 가능성이 높았지만,
'최소한 그가 임진왜란 이후 이미 망해버린 것과 마찬가지인 조선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하지만 역사에서 가정은 부질없는 짓일 뿐이고,
소현세자는 청에 볼모로 잡혀간 지 9년만에 귀국하지만, 귀국 두 달만에 병에 걸려 죽고맙니다.
타국의 9년 생활도 견뎌낸 30대의 건장한 청년이 귀국하자마자 병에 걸려 죽은 것도 이상한데다,
그의 사체에서는 독살의 흔적이 역력했기에
의심의 눈초리는 소현세자를 의심했던 인조에게 넘어갑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인조가 소현세자를 독살했다는 명확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면 인조는 왜 소현세자를 의심하게 되었을까요?
소현세자를 의심하게 된 인조
'이괄의 난' 이후 끊임없이 이어지는 반란과 역모에 인조가 의심이 많아졌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설명했습니다.
그러면 왜 인조는 자신의 아들인 소현세자까지 의심하게 되었을까요?
소현세자가 청에 볼모로 잡혀간지 3년째인 1640년,
조선은 인조의 병을 이유로 소현세자의 일시 귀국을 청에 청합니다.
이에 청은 인조의 3남 인평대군과 소현세자의 장남인 원손 석철을 심양으로 불러들인 후에야
소현세자의 귀국을 허락합니다.
소현세자가 귀국하기 전 청 태종은 직접 세자의 환송연을 열어주며
세자에게 안장을 한 말과 대홍망룡의를 선물하며 입으라고 권합니다.
이 대홍망룡의가 문제였습니다.
대홍망룡의는 한나라의 국왕이 입는 옷으로 세자가 입는다는 것은 인조에게 큰 실수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소현세자는 '국왕의 장복'이라며 거절하였으며 청태종도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던 신득연이 이를 조선에 알렸고
조선에는 '세자가 대홍망룡의를 입고 춤을 추었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이 사건은 과거 임진왜란 때 명이 선조를 무시하고 광해군을 왕처럼 대했던 것처럼,
청 역시도 자신을 폐하고 소현세자를 왕으로 세우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인조가 하게 된 계기가 됩니다.
인조는 먼저 나가 귀국하는 세자를 마중하겠다는 세자시강원(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관청) 관원들의 청을 묵살했으며,
어의를 보내자는 내의원의 청 역시 거부하였습니다.
그리고 세자를 맞이 하는 의식을 모두 폐지시켜버립니다.
따라서, '탐나는도다' 11화에서 보여주는 소현세자의 일시 귀국을 축하하는 이 연회장면은 실제로는 없었을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연회장면에서는 앞서 설명한 '소현세자에 대한 인조의 의심'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소현세자에게 술을 권하는 인조
인조는 저렇듯 거칠게 술을 따른 후 말합니다.
"왕의 자리가 그렇게도 탐이 나더냐?
이 애비가 언제 죽을지 알아보러 온 것이겠지.
청황제를 등에 업고 이 나라를 차지해 바칠 심산이냐?"
인조 뿐만 아니라, 반청을 기치로 인조반정에 성공한 서인들에게
소현세자의 개방적인 태도는 부담스러웠을 겁니다.
어쨌든...인조는 이후 소현세자를 끊임없이 의심합니다.
그리고 청에 볼모로 간지 9년만에 소현세자는 영구 귀국합니다.
소현세자와 그 가족들의 비극적 최후
영구 귀국한 소현세자는 두 달만인 1645년 4월 26일에 급사합니다.
소현세자가 4월 23일 병석에 누운 이유는 학질이었습니다.
이에 어의 이형익이 세자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침을 놓았는데, 세자는 3일만에 세상을 떠납니다.
원래 조선에서는 왕이나 세자가 죽게되면 치료를 한 시의를 국문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런데 인조는 어의 이형익을 옹호하며 국문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형익은 원래 인조의 후궁인 소용 조씨의 사가에 출입하던 의원이었는데 그녀의 추천으로 어의가 된 인물이었는데,
소용 조씨는 세자와 관계가 매우 안좋은 인물이었습니다.
거기에 인조실록에는 "세자가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라는 말까지 적혀있습니다.
또한 인조는 소현세자의 장례절차 역시 최대한 간소화 시켜버렸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들로 인해 인조가 소현세자의 죽음에 관련이 있다는 의심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인조는 소현세자의 가족들에게 손을 뻗히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인조는 세손이 되어야 할 소현세자의 아들 석철이 어리다는 이유로 무시하고,
소현세자의 동생 봉림대군(후의 효종)을 세자로 책봉합니다.
이제 인조는 청과 결탁하여 자신을 몰아내고 세자를 세우려 했다는 의심으로 세자빈 강씨를 압박합니다.
인형이나 동물을 마당이나 베갯속에 묻어두고 상대방을 저주하는 사건이나 음식에 독을 넣는 사건을 벌여 그 죄를 세자빈 강씨에게 돌렸습니다.
강씨를 죽이라는 인조의 명령에 신하들은 강하게 반대하였지만,
결국 인조는 세자빈 강씨를 쫒아낸 후 사약을 먹게 해 죽여버립니다.
그 후 인조는 세자빈 강씨의 어머니를 처형하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 즉 자신의 친손자 셋을 제주도로 유배를 보내버립니다.
세손이 되어야 마땅했을 석철은 다음해 9월에 제주도에서 사망합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 석린 역시 석달 후 죽고 맙니다.
실록에는 풍토병으로 기록되었지만 이들의 죽음에도 의구심은 남아있습니다.
소현세자가 죽은 후 청나라 장수 용골대는 석철을 자신이 데려다 키우겠다고 말했었는데,
인조는 청에서 석철을 키워 인조를 폐위시키고 석철을 왕으로 세울 것이라 의심했습니다.
인조로써는 석철을 죽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죠.
어쨌든 소현세자 일가는 광해군 일가와 비슷하게 이렇듯 안타까운 최후를 당합니다.
마지막으로...
탁월한 중립외교와 군사력 강화: 광해군
친명배금 정책과 군사력 도외시: 인조
여기서 왠지 지난 대통령과 현 대통령이 느껴지시지 않나요?
군대를 다녀온 대통령과 안 다녀온 대통령,
밀리터리 매니아로 널리 알려지고 국방력 강화를 위해 국방비를 증강시키고 국방개혁안을 만든 대통령과
그 국방개혁안을 후퇴시킨 대통령,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90601006006
최신 정찰기인 글로벌 호크를 도입하여 정보력을 강화시키려 했던 그러나 미국의 반대로 아쉽게 실패한 대통령과
미국이 뒤늦게 팔겠다는데도 안사겠다는 대통령,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5/23/2009052300056.html
북한을 다독이며 미국에도 할말을 했던 대통령과 미국만 쳐다보는데 정작 미국에도 무시당하는 대통령
http://media.daum.net/politics/north/view.html?cateid=1019&newsid=20090609103112602&p=viewsn
여러모에서 광해군과 인조는 전 대통령과 현 대통령이 떠오르게 합니다.
'탐나는도다'의 포스터
('탐나는도다'와 관련된 모든 그림의 출처는 http://www.imbc.com/broad/tv/drama/tamra/cast/index.html 입니다.)
MBC의 여름 특선 드라마 '탐나는도다'는 참 매력적인 드라마입니다.
깜찍하고 귀여운 버진 역의 서우의 연기도 그렇고,
일리암과 박규 두 꽃도령과 버진의 애뜻한 마음도 참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거기에 서린상단의 음모와 이를 파헤쳐가는 박규의 이야기를 통해 추리극의 형식을 취함으로서
극의 긴장감을 유지하는 과정 역시 매우 탄탄합니다.
탄탄한 극본, 신인급 위주의 캐스팅임에도 깔끔한 연기, 멋진 화면 구성이 한데 어우러진 좋은 드라마죠.
하지만 이런 류의 잘 만든 드라마들이 늘상 겪는 '시청률에 있어서 고전' 덕택에
결국 조기종영이 결정되고 말았습니다다.(뭐 MBC는 조기종영이 아니라고 항변하지만...)
자극적이고 생각없이 볼만한 드라마들이 인기를 얻는 일이야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웰메이드 드라마들이 늘 시청률의 늪에서 허우적대다 조기종영되는 일은 아쉽기만 한 일입이다.
그건 그렇고, '탐나는도다'는 흥미로운 역사적 인물들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폐위된 광해군과 그를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인조,
그리고 인조가 살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가 그들입니다.
미친 할아방 광해군
인조와 그의 아들 소현세자
'탐나는도다'의 토요일 방송분(12일)에서는 드디어 임금(인조)이 등장했습니다.
오랜만에 TV에서 보는 이병준 씨의 모습이 반가웠습니다.
TV에서 이병준 씨의 캐릭터는 주로 코믹스러운 모습, 평범하지는 않은 모습이었는데,
일리암을 대하는 태도나, 아들인 소현세자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아들인 소현세자에게 "왕의 자리가 그렇게도 탐이나드냐? 이 애비가 언제죽을지 알아보러 온거겠지?"라고 하죠.)
여기서도 역시나 조금은 멍청한듯한 하지만 의심이 매우 많은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인조 임금은 인조반정(仁祖反正)을 통해 그 전의 임금이었던 광해군(光海君)을 폐하고 왕이 되었습니다.
적장자 승계를 통해 정실왕비의 맏아들이 아니면 왕이 될 수 없는 조선의 법도에 따라
원래 인조는 임금이 될 수 없는 인물이었으나,
임금을 끌어내리고 스스로(정확히 말하면 스스로라기 보다는 신료들에 의해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보니,
자신도 언제든 그 자리에서 내려올 수 있다고 생각하여 아들인 소현세자까지 의심하게된 인물입니다.
(정실왕비의 소생을 직계, 후궁의 소생을 방계라고 합니다.)
여기서는,
임금이었던 미친 할아방은 왜 제주도까지 가서 그렇게 살게되었는지,
인조가 왜 그렇게 의심많은 왕이었는지,
그 의심에 소현세자와 그의 가족이 어떻게 죽어갔는지에 대해서 조금은 자세히 적을 생각입니다.
(글이 좀 길다 싶으면 두 번에 걸쳐 얘기할 생각입니다.)
이 이야기에 대해 쓰다보면 광해군과 그의 아버지 선조까지 올라가야 하는지라 재미도 없이 긴 글이 될 것 같으므로,
역사에 관해 관심없는 분들은 주저없이 백스페이스를 누르시는 것이 좋을 듯 싶기도 합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미친 할아방(광해군)은 왜 제주도에 있을까?"입니다.
다시 등장하신 미친 할아방, 광해군
광해군은 1575년에 태어나 1641년에 사망하였습니다. 우리나이로 67세, 만으로하면 66세이죠.
따라서 드라마 소개에 66세로 나온다는 것은 광해군이 곧 죽을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탐라를 기반으로 하여 그를 다시 왕으로 올리고 새로운 국가를 세우려는 서린과 그 상단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갈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겠죠.
뭐, 드라마는 그저 드라마일 뿐이고, 원작 또한 본 적이 없는지라 정말 그렇게 될지 확신은 못하겠습니다.
다만 역사를 비춰 봤을 때는 그렇게 될 것이라 짐작할 뿐이죠.
인조반정(仁祖反正)
(위키피디아: http://ko.wikipedia.org/wiki/%EC%9D%B8%EC%A1%B0_%EB%B0%98%EC%A0%95)
반정(反正)은 글자 그래로 올바른 상태로 되돌린다 라는 뜻입니다.
인조 임금이 그 전의 '올바르지 못한 시대'를 올바른 상태로 되돌렸다는 의미지요.
따라서 인조 임금 전의 시대, 즉 광해군의 시대는 '어지럽고 올바르지 못한 시대'일 수 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인조반정을 일으킨 사람들(주로 서인들)에게
광해군의 시대는 '어지럽고 올바르지 못한 시대'였을까요?
인조반정시 인조와 서인들은 광해군을 폐위시키게된 명분으로 광해군의 세 가지 죄목을 다음과 같이 내세웁니다.
1. 폐모살제(廢母殺弟)를 논하였다.
2. 대규모 토목공사로 민생이 피폐해졌다.
3. 명을 사대하지 않고 후금과 내통하여 명을 배신하였다.
폐모살제
첫 번째로 폐모살제란,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였다'는 뜻입니다.
친어머니는 아니지만 명몽상 분명히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하려 하였고,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광해군은 어머니와 동생에게 왜 이런 일을 행한 것일까요?
이를 알기 위해선 좀 긴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인조전후의 임금들(선조-광해군-인조-효종)은 적장자의 법통에 따라 왕이 된 인물들이 아닙니다.
선조는 중종의 아홉째 아들인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입니다.
(조선최초로 후궁의 아들(방계)이 왕이 된 케이스죠. 선대인 명종이 후사없이 급사하여 운좋게 왕이 되었습니다.)
광해군은 선조의 후궁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입니다.
인조는 선조의 후궁 인빈 김씨의 셋째 아들인 정원군(원종)의 첫째 아들입니다.
효종역시 인조의 둘째 아들로 소현세자가 비명횡사 하지 않았다면 왕이 될 수 없는 인물이었죠.(그나마 효종은 직계이긴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왕조의 비극은 거의 이런 정통성의 문제에서 시작됩니다.
정통성의 문제가 있으면 왕권이 불안정할 수 밖에 없었고,
광해군의 비극도 여기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죠.
앞서 말했듯이 광해군은 선조와 후궁인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로 적자도 장자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가 세자가 된 것은 임진왜란 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후궁의 둘째아들에 불과한 광해군이 어떻게 임금이 되었나
선조의 가계도에서 볼 수 있듯이 선조의 아들은 매우 많았습니다.
저 중에서 임진왜란 후에 태어난 영창대군을 제외하면,
임진왜란 직전에 이미 13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후궁 태생입니다.
당연히 후궁들간에는 엄청난 암투가 있었고
정비의 몸에서 난 적자는 없고 후궁 소생의 아들만 득실대는 이 상황에서
왕자들 사이에서도 선조의 신임을 얻기위한 경쟁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임진왜란이 발생한 것은 광해군에게는 행운이었습니다.
왜군은 파죽지세로 북상중이었고, 도성을 버리고 피난을 가려고 논의 중인 상황에서
종묘사직의 장래와 민심수습을 위해 왕세자 책봉이 건의되었고,
광해군은 단 하루만에 파격적으로 왕세자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전쟁이 끝나고 상황이 안정된 후의 엄청난 논란과 파란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선조와 함께 경복궁을 떠나 의주로 피난을 가면서 왕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버렸습니다.
피난길에 같이 오른 문무관은 100명도 되지 않았고,
왕의 가마가 아직 한성을 떠나지 않았음에도 경복궁은 백성들에 의해 약탈당하고, 왕자궁은 불질러졌습니다.
(사실 조선은 이 때 이미 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세워져도 이상하지 않을 나라였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조선은 망하지 않았고, 이후부터 신하들이 왕을 선택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됩니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선조는 왕세자 광해군에게 왕으로서의 일부 권한을 넘기는 분조(分朝)를 단행합니다.
광해군에게 인사권과 상벌권을 넘겨버린 거죠.
그리고 광해군은 선조의 명에 따라 분조를 이끌고 함경도로 떠나게됩니다.
이때 광해군은 눈부신 활약을 펼치며 백성들에게 아직 조정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알립니다.
광해군은 함경도, 평안도, 강원도와 황해도 등지를 옮겨다니며 민심을 수습하고, 의병의 모집과 전투의 독려,
군량과 말먹이의 수집 운반 등 전방위 활약을 펼칩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왕세자로서의 위치를 굳히게 되죠.
이후 명의 원병으로 전황은 지지부진해지고, 명과 일본은 강화를 논의하고,
선조와 광해군은 다시 서울로 돌아오게 됩니다.
임진왜란 시기의 눈부신 활약으로 광해군의 입지는 단단해졌지만,
한편으로 선조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1594년 송유진은 난을 일으켜 선조를 폐하고 광해군을 왕으로 세우겠다는 기치를 내걸었고,
명은 칙서를 통해 노골적으로 선조를 무시하고 광해군을 추켜세웁니다.
후에 인조가 소현세자에게 그랬듯이 선조도 자연스레 광해군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권력은 부자도 나누지 못하는 것이었으니까요.
선조의 의심에 덧붙여 전쟁시에는 광해군을 추켜세웠던 명나라가 이번엔 광해군을 흔들기 시작합니다.
정실왕비가 아닌 후궁 소생인데다 둘째 아들인 이유로
광해군의 왕세자 책봉을 인정하지 않았던 거죠.
여기에 엎친데 덮친일이 발생합니다.
1602년 선조는 광해군보다도 9살이나 어린 왕비를 맞이 하였는데, 이가 바로 인목왕후(훗날 인목대비)입니다.
그리고 1606년 봄 그녀는 왕자를 낳게 됩니다. 바로 영창대군.
'쾌도 홍길동'의 광해군과 영창군
(KBS의 퓨전사극 '쾌도 홍길동'에서 미친 왕으로 연출된 이광휘(조희봉 분)가 광해군,
그리고 그에게 죽임을 당할 뻔하다 겨우 살아난 왕자 이창휘(장근석 분)가 영창대군입니다.)
http://www.kbs.co.kr/drama/honggildong2008/about/cast/24936_index.html
후궁 소생인데다 둘째 아들이란 이유로 명나라의 왕세자 책봉 승인이 나지 않는 상황에서
정실 왕비 소생의 왕자 영창군이 태어나게 됨으로서,
조정은 또다시 왕세자 논란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에 선조는 매일아침 왕세자의 문안을 거부하고 금지시켜버립니다.
광해군으로서는 초초하기 이를데 없는 곤란한 상황이었겠죠.
이 상황에서 광해군에게는 임진왜란에 이은 두 번째 행운이 발생합니다.
영창군이 3살, 인목왕후가 25살, 광해군이 34살이던 1609년 선조가 눈을 감게 됩니다.
영창군은 아직 세 살의 갓난 아기인데다, 전장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광해군을 상대하기에
인목대비는 아직 아직 어린 존재일 뿐이었습니다.
인목대비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들인 영창군을 보호하기 위해 신속히 광해군을 즉위시키고,
'어린 대군이 마음에 걸린다'는 선조의 유언을 공개하는 일 뿐이었습니다.
(선조의 죽음을 독살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왕이 된 광해군은 그를 왕위에 올리기 위해 죽음도 불사하였던 대북파를 중용합니다.
그 중 정인홍과 이이첨은 핵심인물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후에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쫒겨나게 된 핵심인물들이기도 합니다.
후에 간신의 대명사로 불리게 된 인물들이기도 하지요.(실제로 간신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이들은 광해군의 동복형인 임해군을 교살시켰으며, 역모사건이 일어나자 서인과 남인들을 핍박합니다.
그리고 또다른 역모사건을 유도하여 인목대비의 폐위 논란을 일으키고, 영창대군을 살해합니다.(광해군일기)
여기까지가 인조와 서인들이 인조반정을 일으킨 세 가지 이유 중 첫번째 이유입니다.
광해군은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죽이라는 신료들의 간언에도 이를 행하기를 주저했기에
'광해군이 직접 이들을 죽인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하지만, 광해군이 직접 지시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결국 그가 중용한 대신들에 의해 그들은 살해당하였기에
이는 광해군의 업보이긴 했습니다.
대규모 토목공사
이제 두 번째 이유인 대규모 토목공사입니다.
전란후 광해군은 땅에 떨어진 왕실의 위엄을 세우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불타없어진 궁궐을 짓기 시작합니다.
창덕궁, 창경궁, 경덕궁(경희궁), 인경궁, 자수궁 등 많은 궁궐을 짓는데 집착했습니다.
임진왜란 후 경복궁과 창덕궁 등이 불타버린 상황에서 궁궐을 새로짓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는 규모가 큰 궁궐을 너무나도 많이 지어버렸습니다.
궁궐 건설에 필요한 자재와 인력 그리고 재원의 조달 문제가
아직 전란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백성들에게 엄청난 고통으로 다가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두 번째 이유인 대규모 토목공사는,
'어쩔 수 없었지만 너무 과했다' 정도로 정리하고 싶군요.
명을 배반했다?
여기까지 이유만 보면 광해군은 폐위되어 마땅한 임금이었습니다.
왜란때문에 안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여 민생을 피폐하게 만들었고,
(그가 직접하지는 않고 신하들이 했다지만) 결과적으로 형과 동생을 죽이고 어머니를 폐하려했으니까요.
하지만 그는 그렇게까지 나쁜 왕은 아니었습니다.
'쾌도 홍길동'에서 묘사한 것과 같은 미친 왕도 아니었구요.
인조반정을 일으킨 사람들은 광해군이 명을 배신했다고 하지만 당시 정세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후금의 누르하치는 여진을 통일하고 명에게 강력한 위협을 가하는 세력으로 성장하였습니다.
명을 사대하는 조선의 입장에선 명의 눈치를 보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만
그에 맞서는 세력으로 성장한 후금의 눈치도 봐야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이 택할 수 있는 선택은 딱 세 가지입니다.
1. 대의명분을 중시하여 명을 지원하고 후금을 배척한다.
2. 과감하게 명을 배척하고 후금을 지원한다.
3. 명과 후금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다 이긴 쪽에 붙는다.
외교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패는 보여주지 않고 어장관리 하듯이 놀다가 결국에 실리를 취하는 것입니다.
광해군은 이런 실리를 추구한 대표적인 군주였습니다.
외교에 있어서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이렇습니다.
"명과 청 사이에서 탁월한 중립외교를 펼쳤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겨우 십 수년.
전란의 상처를 다독이기에도 바쁜 와중에 사나운 후금과 일일이 맞대응 할 여력은 조선에게는 없었습니다.
이에 광해군은 후금을 다독이며 유연하게 대처하여 평화를 유지하고자 하였습니다.
어차피 조선의 입장에서 여진은 오랑캐.
사납지만 변변찮은 오랭캐에게 명분을 이야기해봐야 '쇠귀에 경읽기'이므로 살살 구슬리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이와함께 후금이 쳐들어왔을 때를 대비해 광해군은 힘을 키우기 시작합니다.
먼저 후금에 첩자를 보내어 후금의 동향을 탐지하고 군사 훈련에 집중하고 방어태세를 점검하였습니다.
각종 화포를 제작하기 위해 조총청을 화기도감으로 확대, 개편하였고
당시 원수와 같았던 일본과 국교를 재개하여 일본의 조총을 확보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강력한 군사력이 없어서 임진왜란을 겪었던 군주로서 당연한 선택이었지요.
하지만 중립외교만으로 당시 정세에 대처하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명은 청의 위협에 대처하고자 조선에 원병을 요청했고,
왜란에서 명의 은혜를 입은 조선은 원병요청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광해군은 원병을 피하고자 노력하였지만 결국 어쩔수 없이 도원수 강홍립 휘하의 조선군 1만을 보내고 맙니다.
이 중 5천은 임란 이후 공들여 키운 정예 조총병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원군은 심하전투에서 대패했고,
조선의 입장에서는 타국간의 전쟁이기에 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해 강홍립은 후금에 항복합니다.
강홍립은 후금에 억류된 와중에도 광해군에게 각종 정보를 보냈고,
이는 후에 광해군의 외교정책의 기본 자료로 활용되었습니다.
이런 광해군의 외교정책은 '실리'라는 면에서 보면 당연한 것이었지만,
사대주의에 찌들은 조선 사대부들에게는 말도 안되는 일이었습니다.
사대부들에게 광해군의 외교정책은 '강상 윤리를 무너뜨린 행위'였을 뿐이었지요.
그리고 전란의 충격에서 아직 회복하지 못한 조선에게 원병 1만은 심각한 악영향을 불러왔습니다.
당시 전투병은 평안도 3500, 전라도 2500, 황해도 2000, 충청도 2000 등 전국 각지에서 불러모았는데,
전란을 수습하기에도 힘든 상황에서 건장한 장정 1만을 불러모으는 과정에서
각지의 불만이 속출하는 것은 불보듯 뻔한 상황이었습니다.
거기에 병사 1만에게 지급할 군량을 마련하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었지요.
이 과정에서 백성들의 불만은 하늘을 찌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원하지 않은 파병으로 인해 광해군은 백성과 사대부 양쪽의 반감과 불만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만 했고,
이것이 광해군의 비극이고 운명이었습니다.
임해군과 영창대군의 죽음, 인목대비의 폐모논의 등으로 인한 대북의 정권 장악과 전횡, 그리고 서인의 몰락,
대규모 토목공사와 파병으로 인한 백성의 불만 등으로 인해 조선사회는 매우 동요하고 있었고,
광해군을 폐위시킬 명분은 이미 충분히 갖춰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인조반정으로 인해 결국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됩니다.
만약 광해군이 좀 더 정치력을 발휘하여 대북파만을 중용하지 않고 신료들을 조정하는 데 성공했다면,
대규모 궁궐 건설을 최대한 자제하고 최소한의 공사만 시행했더라면,
아마도 폐위만은 피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역사에 가정은 없습니다.
하지만 광해군의 행적은 임진왜란이 낳은 역사적 산물로 어쩔 수 없다는 것이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안타까운 광해군 일가의 최후
광해군은 인조반정 후 부인 유씨, 폐세자 부부와 함께 강화도로 유배됩니다.
그에게 영창대군을 잃은 인목대비는 광해군을 끝까지 죽이고자 했지만,
인조와 신료들의 반대로 광해군은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였다는 것을 반정의 명분으로 내세웠기에,
광해군을 쉽사리 죽일 수는 없었던 것이었죠.)
하지만 그는 곧 아들 부부와 아내를 잃고 맙니다.
폐세자는 유배된 집 마당에 땅굴을 파서 탈출을 시도하지만 곧 발각되었고,
인조의 명에 따라 자진하게 됩니다.
그의 아내 폐세자빈은 식음을 전폐하였다가 스스로 목을 매 자살합니다.
그리고 몇 년 후 부인 유씨마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유배지는 여기저기로 옮겨지다가 1637년 제주도로 옮겨집니다.
1637년은 광해군에게 명을 배반했다고 했던 인조가 청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세 번 절하고 이마를 아홉번 땅에 대며
항복선언을 한 삼전도의 치욕을 당한 해입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4년 후인 1641년 제주도 유배지에서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16년간 재위했던 그가 1622년 폐위되었으니 그 후로도 19년을 더 산 셈이지요.
또 등장한 미친 할아방
이런 이유로 미친 할아방은 탐라에 있게 된 것입니다.
시놉시스상 66세이고, 광해군은 1575년에 태어났으니 드라마는 1640년이나 1641년을 그리고 있을 겁니다.
서린의 계획
다시 '탐나는도다'로 돌아가서,
서린은 인조반정 때 부모를 잃고 겨우 살아남아 복수를 하려고 합니다.
(일요일 방송분에선 자신을 죽이려했던 하인을 찾아 죽였었죠.)
그런 꿈이 점점 커져 이제는 광해군을 왕으로 추대하여 탐라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국가를 세우려 하지요.
드라마에서 보면 미친 할아방은 이런 사실을 대충 알면서도, 이에 동조할 생각은 없는 듯 합니다.
이미 20년 가까이 한 유배생활로 정치적 야심은 거의 사라졌을테고,
정치적으로 동조해줄 대북파도 전멸한 상황이니 조선최고라지만 한낫 상단 하나로는 어찌할 상황이 아닐겝니다.
그리고 앞서말했듯 미친 할아방은 곧 천수를 다하게됩니다.
안타깝게도 서린의 꿈은 그저 꿈으로 끝날 듯 합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인조와 소현세자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소현세자는 광해군보다 더 비극적인 인물인데다
(아버지인 인조에게 온가족이 몰살당합니다..;;)
왕이 되지 못하고 죽은 세자 중에서는 사도세자와 함께
'왕이 되었다면 역사가 바뀌지 않았을까' 싶은 인물이기도 합니다.
(물론...역사에 가정은 없습니다..--;)
ps.
재미있는 건 광해군을 고 노무현 전대통령에 비교하는 견해가 많은 반면,
http://search.daum.net/search?nil_suggest=btn&nil_ch=&rtupcoll=&w=blog&m=&f=section&lpp=10&q=%B1%A4%C7%D8%B1%BA+%B3%EB%B9%AB%C7%F6
일부이긴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과 비슷하다는 견해도 있다는 것입니다.
http://search.daum.net/search?nil_suggest=btn&nil_ch=&rtupcoll=&w=blog&m=&f=section&lpp=10&q=%B1%A4%C7%D8%B1%BA+%C0%CC%B8%ED%B9%DA
개인적으로, 광해군을 현 대통령과 비교하는 건 광해군에게 치욕이라 봅니다.
지못미 광해군..ㅜ.ㅜ;
'한성별곡 - 正'은 조선시대의 마지막 황금기였던 정조시대,
정조말기의 정치적 격변기를 살아간 임금, 중인, 서얼, 그리고 노비를 통해 그들의 고뇌와 실패를 그려낸 드라마이다.
한성별곡은 기존의 사극과는 여러 점에서 다르다.
절대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보통의 사극은 영웅(절대선)의 일대기를 그리기위해 절대악을 등장시킨다.
주몽, 해신, 불멸의 이순신, 대장금, 정조 이산, 선덕여왕, 태왕사신기(얘는 사극이 아니라 판타지지만..) 등
최근 몇 년간 시청자를 사로잡은 사극에는 예외없이 절대악인 주연급 인물이 등장한다.
그리고 사극속 우리의 주인공들은 이런 절대악을 극복해가며 성장하여 승리하고, 결국 영웅이 된다.
'한성별곡'속 주연급에 절대악은 없다.
임금과 세 젊은이(중인, 서얼, 노비)는 각각 자신이 소망하는 꿈(正,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이 있고,
각자의 방법으로, 때로는 악한 수단까지 마다하지 않고 그 꿈을 위해 나아간다.
선(善)과 악(惡)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正)을 위해, 또는 자신 정이라 생각하는 것을 위해, 나아가다보면
선이 될 수도, 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현실에선 최선은 존재하지 않으며, 차선 또는 차악만이 존재한다.
그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몫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옳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서 방황하며 그들은 고뇌한다.
'이것이 과연 옳은 길인가, 옳은 방법인가?'
'한성별곡'은 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이런 고뇌를 잘보여주는 수작이었다.
(물론 현실은 '커피프린스 1호점'과 맞붙어 시청률은 박살이 났지만..;;)
그리고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고민 좀 하고 살라고, 자신을 돌아보고 살라고, 앞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을까 생각해보라고 역설한다.
(한성별곡 박진우 작가 인터뷰, http://blog.kbs.co.kr/kwarkjh/1663)
사전제작, 그것이 진리!
최근 종영한 MBC 드라마 '혼'은 명품드라마의 싹을 보여줬던 드라마가
사전제작하지 않아서 시망하게 된 아주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MBC 자체제작임에도 외주제작과 같은 출연진과 OST, 같은 소속사에 속한 조연급 연기자들의 엉성한 연기, 10부작임에도 중간에 바뀐 작가로 인해 끊긴 스토리의 연속성 등)
'한성별곡'은 반대로 사전제작을 하면 어떤 드라마를 볼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일단, 사전제작을 하니 극의 내용이 시청률에 따라 바뀌지 않고 일관성을 유지하였다.
이를 통해 탄탄한 구성과 연출, 그리고 치밀한 스토리가 가능했다.
(시청률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공영방송인 KBS 드라마의 힘이기도 하다.
그 덕에 부활, 마왕과 같은 명품 드라마가 탄생한 것이 아닐까?)
또, 사전제작을 통해 충분한 촬영시간이 보장되니 젊은 신인급 연기자들의 연기력 발전이 눈에 보였다.
서얼로 태어나 현실과 이상사이에서 고민하며 현실에 좌절한 박상규 역의 진이한.
참판의 딸로 선진문물과 사상을 접하고 높은 꿈을 꾸었던, 하지만 역도의 자식이 되어 다른 방법으로 꿈을 쫒은 이나영 역의 김하은.
양반이 아닌 자들을 위해 부를 쌓아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양만오 역의 이천희.
이 세 명의 신인급 연기자들은 극 초반 어색한 연기로 극에 대한 몰입을 방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충분한 시간이 약이 되었는지, 회를 거듭할 수록 안정된 연기력을 보여주더니 후반에는 어떤 흠도 없었다.
거기에 주조연급 중견연기자들은, 자신의 역할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연기가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었다.
그 중에서도 임금 역의 안내상의 연기는 발군이었다.
안내상 씨의 그런 연기는 작가, 감독과의 충분한 대화와 정조에 대한 충실한 사전연구를 바탕으로 이뤄졌는데,
(http://www.magazinet.co.kr/Articles/article_list.php?mm=002003000, 이 링크에서 안내상의 인터뷰를 보면 알 수 있는데,
아쉽게도 매거진넷은 2008년에 망했다..-_-; 그래서 지금은 저 링크를 클릭해도 인터뷰를 볼 수 없다는..;;)
이 역시도 사전제작을 통해 배우에게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작가 인터뷰 중...
- 안내상이 연기한 왕은 독특했다. 피곤하고, 불안했고, 조급해 보였다. 대본 쓸 당시 캐릭터는 어떻게 잡았나?
개인 내부의 복수심을 억누르려는 군주, 기득권에 대항해 자신의 개혁의지를 실행에 옮기려는 군주, 좌절하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군주, 이 정도가 대본 쓸 당시 캐릭터였다. 하지만 안내상씨는 대본 그 이상의 정조를 보여줬다. 그것은 대본을 뛰어넘는 배우의 개인 능력이 뿜어져 나온 것이라 생각하는데, ‘한성별곡’에서는 안내상씨를 비롯해 많은 분들이 연기란 무엇이다라고 몸소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현실을 반영한다.
작가의 말처럼, 역사 어느 때이건 돌이켜보면 언제나 현재와 유사한 점이 많다.
그 중에서도 정조시대는 현재와 특히 더 유사한데,
(이앙법의 보편화가 가져온 부의 편중과 그로 인한 양극화, 화성천도 시도와 기득권의 반발, 정치권의 심각한 갈등 등
- 작가 인터뷰 참조)
한성별곡은 아예 노골적으로 현실을 풍자해버렸다.
드라마 내에서도 그렇지만 티저예고 영상은 드라마를 통해 현실을 반영해보려는 제작의도를 대놓고 보여준다.
노무현 대통령께서 돌아가셨을 때,
김대중 대통령께서 '실천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고 역설하셨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이 이 드라마였다.
현실과 너무도 비슷해서...
소망하지 않는다면 어찌 얻을 수 있을까
애쓴만큼 얻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바로 나라의 녹을 먹는 우리가 해야할 일 이 아닙니까
그대로 두는 법을 안다면 그대로 두어라. 허나 그 법이 쉽지 않지
진실을 알고 싶습니다
알면....감당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것이 누구를 위한 미래란 말이오
조선의 백성들과 조선의 후손들을 휘한 미래입니다
어찌 희생하지 않고서 그 신념을 지켜낼 수 있겠습니까
두려움에 떤다면 어찌 모든 것을 걸 수 있겠습니까
나의 신념은 현실에 조롱당하고, 나의 꿈은 안타까운 희생을 키우는데...
포기하기 않는 나는 과연 옳은 것이냐...
마지막 소망, 내 나라 조선입니다.
소망하지 않으면, 희생하지 않으면 신념을 지켜낼 수 없다.
하지만 현실은...
소망하는 사람도, 희생하는 사람도 없고,
주위엔 온통 신념따윈 개나 줘버린 사람뿐이다...후...
ps.
'한성별곡'에서 모든 음모의 중심이었던 정순왕후 역의 정애리 씨는
채널CGV의 드라마 '정조암살미스테리 - 8일'에서는 그 대척점에 있던 혜경궁 홍씨의 역을 맡았다.
http://www.chcgv.com/special/8days/community/main.asp
전혀 다른 역할을 거의 같은 시기의 두 드라마에서 맡았던 정애리 씨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1. 미륵사지 석탑
그림 1. 해체 전의 미륵사지 석탑
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
(http://www.nricp.go.kr/kr/data/mkr/find/view_home_img.jsp?img_path=http://221.145.178.204/nrichdata/common/culture_img/1_8.jpg&img_caption=3차원 스캐너를 이용한 석조문화재 보존)
미륵사지 석탑은 백제 무왕 때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는 현존 최고최대(最古最大)석탑으로
백제 목탑을 추측해 볼 수 있는 목탑형 석탑이다.
백제의 무왕과 그의 아들 의자왕으로 이어지는 시기는 백제의 마지막 전성기로 볼 수 있는 시기이다.
(의자왕은 삼천궁녀처럼 방탕과 사치의 대명사로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신라에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하여 신라의 40 여성을 함락하여 신라에 두려움을 준 군주이다.
의자왕에 대한 이야기는 무궁무진하고 또 재미있지만,
글의 주제를 벗어나 샛길로 빠질 수 있으니 다음에 기회가 될 때...)
미륵사의 창건배경에 대해서 말하려면 무왕이 백제의 왕이 되기 전후 시기의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
(MBC 드라마 '선덕여왕'의 시기가 바로 이 시기)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 시기에 한성을 빼앗기고 수도를 지금의 공주인 웅진으로 천도하였다.
이후 백제는 여러 차례 위기를 극복한 후 성왕 시기에 다시 중흥의 기틀을 마련한다.
성왕은 신라와 그 유명한 나제동맹을 맺고 빼앗겼던 한강유역의 6군을 회복할 뻔하였다.
이때의 전투에서 주력군은 백제군이었고, 신라군은 보조군대에 지나지 않았으니,
백제로서는 당연히 옛 땅을 회복할 것이라 생각했겠지만,
신라 진평왕(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도리어 이 땅을 신라에게 빼앗기고 만다.
이에 분노한 성왕이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그는 관산성(현재의 옥천)에서 전사하고 만다.
이후부터 백제의 멸망시기까지 백제와 신라는 전쟁상태에 놓이게 된다.
성왕의 전사이후 백제는 귀족들의 발호로 인해 심각한 위기에 빠졌고,
법왕과 혜왕은 즉위한 지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귀족들에 의해 살해된다.
이러한 혼란의 시기를 수습하고 백제의 마지막 중흥기를 이룬 군주가 서동요로 유명한 무왕이다.
무왕은 위기극복과 왕권강화를 통해 체제정비를 추구한 동시에,
신라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는데(재위 42년간 12차례나 신라를 공격),
동양최대의 사찰인 미륵사는 이런 목적을 위해 건설되었다고 볼 수 있다.
(미륵사가 위치한 전북 익산은 태어나자마자 쫓겨난 무왕에게 도움을 준 세력의 근거지이자,
신라와의 격전지에 매우 가까이 위치한 지역이기도 하다.)
미륵사는 이와 같은 역사적인 가치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 보았을 때,
미륵사지 석탑은 목탑에서 석탑으로의 양식 이행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 문화재이므로 매우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림 2. 미륵사지 석탑 추정도
이런 미륵사지 석탑은 지진, 지반의 부동침하 등의 외부요인으로 인해
일부가 붕괴되어(되었다고 추정되어) 몇 번의 개보수 과정을 거쳤는데(그림 1 참조),
1998년 구조안전진단결과 추가 붕괴의 위험성이 제기되어
붕괴원인조사 및 복원을 위하여 2001년 해체보수 작업에 착수하여 현재까지 해체가 진행 중에 있다.
본래 미륵사지 석탑의 복원은 2007년 완료될 예정이었지만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90120019008)
해체 과정에서 사리장엄구의 발견, 복원작업의 어려움 등의 이런저런 이유로
2009년까지 미뤄졌다가 또 다시 2014년으로 미뤄졌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미륵사지 석탑 정비계획을 위한 구조안정성 평가연구’에 관련된 연구용역에
아주 잠깐(3개월 정도?) 참여하여
자문회의도 두어 번 참석해보고 미륵사지 석탑의 복원 현장을 몇 번 찾아가 본 적이 있다.
그래서 이 글은 구조공학적 및 암석역학적으로 보았을 때
미륵사지 석탑의 복원이 왜 계속 미뤄지는 지에 대한 내용을 최대한 쉽게 다뤄보려고 한다.
(글 쓰는 능력이 떨어져서 정말 쉬울지는 미지수..;;)
뭐, 이런 주제의 글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지 의심스럽긴 하지만,
남들은 관심을 갖지 않는 마이너한 블로그를 지향하니 만큼..;;
2. 미륵사지 석탑의 구조
구조적으로 봤을 때, 미륵사지 석탑은
그림 3. 미륵사지 석탑의 구조의 추정도
가로, 세로는 각각 1m 정도, 그리고 높이는 얼마더라?;;
치장석(그림 4)은 탑의 외부에서 보게 되는 면의 돌로서,
지붕모양의 옥개석, 상옥개받침, 하옥개받침, 면석, 하방석으로 구성된다.
미륵사지 석탑의 한 층은 위 5개의 돌들이 석탑의 4면을 둘러싸면서 이뤄진다.
그림 4. 1개 층의 치장석 구성
적심석은 치장석과 심주석사이의 공간에 채워넣는 돌로써, 크기와 모양이 매우 불규칙하다(그림 5 참조).
불규칙한 적심석사이의 공간은 모래와 진흙 등으로 매꿔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석탑 건설 초기에는 적심석 역시 탑의 하중을 기단부로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비, 바람 등으로 인해 적심석 사이 공간이 비워진 후에는
탑의 하중을
그로인해 외부 치장석에서 균열 및 파괴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적심석이 단순히
간단하게 말하면 다음과 같다.
치장석: 탑 겉모습
적심석: 탑의 하중을
그림 5. 2층까지 해체되고 1층만이 남았을 때의 미륵사지석탑
3. 미륵사지 석탑의 붕괴 원인
미륵사지 석탑은 조적식 구조물이다.
조적식 구조물이란 돌 ·벽돌 ·콘크리트블록 등을 쌓아 올린 건축구조로서,
내구성은 우수하지만 지진 등에 의한 수평방향의 외력(外力)에 대하여 약한 단점을 가지고 있다.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이러한 조적식 구조물에 대한 체계적인 해석 및 보수, 보강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는 편인데,
미륵사지 석탑에 관한 대부분의 구조적 연구 역시,
건립시기와 양식 등의 심미적 관점의 건축사 연구가 주를 이루고 있다.
현재 미륵사지 석탑에 대한 구조공학적 관점의 연구는
미륵사지석탑의 붕괴원인을 분석하는 단계까지 진행되어있다.
기존 연구결과의 추론과 검증에 따르면 붕괴원인은
지반의 침하로 인한 적층구조물의 안정성의 저하,
낙뢰로 인한 상부 구조물의 탈락,
지진 및 바람하중으로 인한 과도한 횡변위
등으로 추정하고 있다.
낙뢰로 인한 상부 구조의 탈락과 지진 등이 사료에 언급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철탑도 아닌 석탑이 낙뢰로 인해 (일부) 붕괴되었다는 건 개인적으로 믿기 어렵고,
(아, 그림 2에서 보면 상륜부가 금속으로 되어있으니 가능할지도..;;)
지진이 거의 없는 국내 특성상 지진이 석탑 붕괴의 일부 또는 전체 원인이었다는 것 역시 믿기 어렵다.
개인적으로는
1. 지반침하로 인한 석탑의 안정성 저하
(미륵사 서탑 초석 최대 16㎝ 기울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8041805461&code=960201)
2. 적심석 사이 진흙과 모래의 유실로 인한 치장석 및 적심석의 하중 증가와 치장석의 파괴
이 두 가지가 미륵사지 석탑 붕괴의 주된 원인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실제로 해체되기 전후의 치장석과 적심석을 살펴보면 곳곳에 균열이 발생한 것이 보인다.(그림 4, 6, 7, 8)
그림 6. 파괴된 치장석 1
그림 7. 파괴된 치장석 2
그림 8. 파괴된 적심석
4. 일제 강점기의 미륵사지 석탑 붕괴 방지 대책은?
중고등학교 때 국사시간에 배웠듯
붕괴를 막기 위해 또는 힘을 과시하기 위해
일제 강점기에 콘크리트를 발라 놓았다고들 한다.
(고등학교 졸업한 지 십 수 년이 지난지라 요즘에 어떻게 배우는지는 잘 모른다..;;)
개인적으로는 그 당시의 붕괴 방지 대책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본다.
일단 그림 1을 다시 보자.
그림 1. 해체 전의 미륵사지 석탑
그림 1을 보면
석탑 붕괴를 방지하기 위해 기단 및 1층 부분에 석축을 쌓은 조선시대의 보수,
그리고 콘크리트로 붕괴 방지를 한 일제 강점기의 보수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그냥 그 시대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붕괴 방지를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음 그림을 보면 이를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림 9. 치장석의 입체도(북서측)
그림 9는 2층 이상의
해체 직전의 1층과 기단부, 조선시대에 축조한 석축, 그리고 6층까지의 치장석만을 도시한 그림으로
치장석의 하중을 지탱하는 돌들이 없을 경우에
미륵사지 석탑이 구조적으로 얼마나 불안정한 지를 확연히 보여준다.
비, 바람으로 인한 풍화, 적심석간의 모래 및 점토 유실, 석탑 상부 붕괴 등으로로 인해
적심석과
앞서 그림 6과 7에서 본 것과 같이 치장석 자체에도 상당한 균열이 발생하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림 9와 같이 치장석이 기울어진 상태의 미륵사지 석탑이 붕괴직전이었다는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당시 석탑의 붕괴를 막을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콘크리트였다는 점 역시 쉽게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콘크리트를 이용한 붕괴 방지가 콘크리트와 접촉한 석재 부위의 부식을 가속시켰다는 비난은 피할 수 없다.
흔히 붕괴 방지를 위하여 석탑의 뒷부분에만 콘크리트를 시공하였다고 생각하지만, 아래 그림과 같이,
외부 치장석 간의 접촉 부분에서 유실된 석재 부분과 치장석 자체의 균열부분에도 콘크리트가 시공되어
이 부분에서도 부식이 촉진된바 있다.
또한 석탑 해체 후에 이 부분의 콘크리트를 제거하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들어간 것으로 안다.
그림 10. 콘크리트를 통한 일제의 치장석의 보수
하지만,
‘저 시대에 돌, 모래, 진흙의 구시대적인 재료와 콘크리트를 제외하고
석탑의 붕괴 방지를 위한 재료가 과연 무엇이 또 있었는가?’
‘그러면 붕괴 직전인 석탑을 과연 그냥 두었어야 할 것인가?’
에 대해 잠시만 생각해본다면,
일제의 석탑 붕괴 방지 대책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조금은 가혹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엔 돌로 막았고, 일제시대엔 콘크리트로 막았다.’
‘그나마 걔네들 덕분에 석탑의 원형에 대해 조금이나마 더 가깝게 알 수 있었다.’
뭐 이정도로 생각해 줄 수 있지 않을까?
뭐, 이 부분은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고,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다.
5. 미륵사지 석탑의 복원은 왜 계속 늦어지는가?
미륵사지 석탑의 복원 계획이 2007년, 2009년, 그리고 2014년으로 왜 계속 미뤄지는가는
미륵사지 석탑 중 동탑의 복원 형태와 이미 설명한 내용을 조합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림 11에서처럼 현재 복원중인 미륵사지 석탑은 미륵사의 서쪽(정면에서 좌측)에 있는 탑이고
동탑은 탑 부지 주변에는 탑 부재들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는데,
서탑을 통해 그 원형을 추정하여 1993년에 복원되었다(그림 12).
그림 11. 미륵사 추정도
(출처: 미륵사지유물전시관 홈페이지 http://www.mireuksaji.org)
그림 12. 1993년 복원된 미륵사지 동탑
미륵사지 동탑은 극히 일부분의 부재를 재사용 한 것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부재는 현대식으로 가공하여 복원되었는데,
이때문에 '백제 석탑의 고풍스러움과 운치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고 하여
(http://www.segye.com/Articles/News/Culture/Article.asp?aid=20071002002511&ctg1=12&ctg2=00&subctg1=12&subctg2=00&cid=0101051200000&dataid=200710020856000004)
‘실패한 문화재 복원사례가 아닌가’하는 논란이 일었었다.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php?bid=2536290&menu=dview&dencrt=zaRFGb2sNxbUXl0VbTY4NENaS2R3UHVsMzM4RjdweGJseldRU0hjUHNHU3RRSks3SVUwZGRLTnJOd1JaYnhjYw==&query=%B9%CC%B8%A4%BB%E7%C1%F6+%B5%BF%C5%BE+%BA%B9%BF%F8&term=#middle_tab)
서탑의 복원이 늦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현재 미륵사지 석탑의 복원은 본래 남아있던 6층까지만 복원될 계획이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tvh&oid=052&aid=0000210360)
6층까지 만의 복원에도 여러 계획안이 있는데,
크게 보면 그림 13과 같은 1안과 2안으로 나눌 수 있다.
1안 2안
그림 13. 미륵사지 석탑의 복원안
1안의 방법은 탑의 뒷부분에 현대적인 부재를 사용하여야 하기 때문에(붉은 타원 부분, 북서방향),
고풍스런 백제의 멋을 살리지 못했다는 동탑에 대한 비판을 그대로 적용 받을 것이기에 가급적 배제해야한다.
따라서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복원을 하려면 2안과 같은 형태가 최선의 대책일 것이다.
하지만 복원과정에서,
1. 앞서 그림에서 보았듯 치장석 자체도 파괴되거나 균열이 발생하였다는 점,
2. 현재의 적심석(황색 부분)은 표면이 상당부분 풍화되고 상당수는 균열이 발생하여 사실상 사용할 수 없다는 점,
3. 적심석의 형태가 불규칙하여 적심석 사이의 공간이 빈 공간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점
4. 2안과 같은 형태의 복원은 구조적인 불안정성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점
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위와 같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1. 파괴되었거나 균열이 발생한 치장석과 적심석은 석재용 접착제를 사용하여 접착하고,
2. (모래와 진흙은 비로 인해 유실될 수 있으므로)
적심석 사이의 빈공간은 일정강도 이상의 현대적 인공 충진재로 채워넣으며
3. 그래도 발생할 수 있는 구조적 불안정성을 해결하기 위해 일제의 콘크리트와 같은 인위적 구조물을 석탑 뒷부분에 설치하여야 한다.
일단 3번의 방법은 우리가 일제에게 가했던 비판과 같은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1, 2번의 방법 역시 탑의 내외형을 보기 흉하게 만들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어떤 방법을 적용하든 현대적 인공 부재 또는 충진재의 사용은 불가피하기 때문에
복원된 동탑이 받은 비판을 또 다시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문화재청은
구조진단 결과 붕괴위험성이 예측되어 어쩔 수 없이 해체하였는데,
복원하려고 하니 ‘최악의 문화재 복원 사례’라는 동탑이 받았던 비판을 면할 수가 없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면초가, 진퇴양난... 뭐 이런게지...)
그나마 이런 비판을 최소화하려면, 복원 책임자가,
1. 역사학과 고고학 전문가의 조언들 받고,
2. 건축구조공학 전문가의 해석을 통한 조언을 받아 구조적 안정성을 담보하여야 하며,
3. 충진재, 접착제와 관련된 부분은 재료공학자의 실험을 통한 조언을 받아 사용하고,
4. 치장석, 적심석,
5. 지반침하와 관련되어서는 지반공학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야한다.
그리고 이 모든 면을 고려하여 모든 전문가들이 수긍할 수 있는 최적의 복원을 해야한다.
결국 복원 책임자는 모든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어야하는 아인슈타인 이상의 천재가 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자문회의에 참석해보면 각 분야 전문가 사이에도 의견이 분분하여
매 자문회의는 각 전문가가 자기 얘기만 하는 중구난방이 되기 일쑤다.
구조해석에 참여한 석박사 이상의 선후배들과 얘기한 결과는,
원형그대로의 복원은 ‘불가능’이었다.
이런 내우외환의 문제에 봉착한 문화재청이 과연 어떤 혜안을 제시할 것인지 기대된다.
고 장자연 씨의 유서에 적힌 성상납 문제로 온통 시끄럽다.
개인적으로 별로 관심이 없는데도 방송에서 하도 떠들어대니 조금은 볼 수 밖에 없을 정도다.
(기자들은 기사거리 넘쳐나서 신났을 듯..;)
고 장자연 씨 사건을 보고 있자니,
예전에 어디선가 읽었던 '조선시대의 양대 섹스스캔들'이라는 조금은 선정적인 주제로 글이 쓰고 싶어졌다.
1. 칠거지악(七去之惡)과 삼종지도(三從之道)
드라마 '천추태후'의 왕욱과 황보설
드라마 천추태후를 보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보수적인 옛 시대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상황이 종종 등장한다.
고려 태조 왕건의 부인 신정왕후 황보(皇甫)씨가 낳은 대종(戴宗) 왕욱(王旭)은
태조와 정덕왕후 유씨가 낳은 배다른 누이 선의왕후와 결혼하여
성종(6대), 천추태후(헌애왕후)와 헌정왕후를 낳는다.
이 중 헌애왕후(황보수)와 헌정왕후(황보설)는 사촌오빠인 경종(5대)과 결혼하고
헌애왕후는 경종과의 사이에서 경종이 죽기 1년 전 유일한 왕자 송(誦, 훗날 목종(7대))을 낳는다.
경종이 죽은 헌애왕후는 외가친척인 김치양 정을 통하여 아이를 낳았다.
헌정왕후는 이복숙부 안종(安宗) 왕욱(王郁)과 정을 통하여 아이를 낳는데, 이 아이가 훗날 현종(8대)이 된다.
정신없이 복잡하지만 재미있지 않은가?
자매가 사촌과 결혼했다가 남편이 죽자 외가친척, 삼촌과 정을 통하는 이런 상황은
현대 사회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일지 몰라도,
근친혼이 하나의 풍습이었던 고려시대에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근친혼 뿐만 아니라 위에서 알수 있 듯 고려시대에는 남편을 잃은 여인들의 재가도 비교적 자유로웠다.
고려전통의 정조 관념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유교적 잣대와는 달랐던 것이다.
하지만, 유학을 고려의 통치이념으로 삼으려던 그녀들의 오빠 성종은 이런 상황을 용납할 수 없던 것 같다.
그는 김치양에게 곤장을 친 후 귀양 보내었으며, 안종 왕욱 또한 경상도 사천으로 귀양 보내졌다.
자유로웠던 여성의 지위는 성리학의 나라 조선이 세워진 후에 급격히 떨어지게 된다.
이는 유교가 여성에게 강요했던 칠거지악(七去之惡)과 삼종지도三從之道)에 여실히 드러나있다.
칠거지악(七去之惡): 남편의 일방적인 의사표시로 아내와 이혼할 수 있는 일곱 가지 잘못
在家從父: 집에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適人從夫: 시집을 가면 지아비에게 순종하며,
夫死從子: 지아비가 죽으면 아들의 뜻을 따라야 한다.
조선시대의 여성 억압은 남성들에 의해 구조적으로 또한 집요하게 자행되어왔던 것이다.
이를 벗어나는 또는 벗어나려는 여성은 생존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하지만, 조선의 모든 여성들이 이런 억압에 종속되었던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여성은 억압에 순응하면서 살아갔지만,
일부는 저항하고 또 일부는 오히려 남성을 지배하며 살아갔다.
여기서는 이들 중에서 성(性)적으로 남성을 지배했던 두 여성, 감동과 어우동에 대하여 적어보려한다.
단원 김홍도의 춘화
김홍도와 신윤복은 바람의 화원에서처럼 생동감 있는 풍속화나 인물화만 그린 것이 아니다.
그들의 춘화는 생각보다 훨씬 더 하드코어적이다...-_-; 하드코어한 춘화는 아래 링크에서...
http://blog.empas.com/hspark2050/32052770
감동(甘同)은 조선 세종 때 남자 30 여명과 간통한 죄로 처벌 받은 여자이다.
아버지는 검한성(檢漢城)을 지낸 유귀수(兪龜壽)였고, 남편은 평양현감을 지낸 최중기(崔仲基)였다.
남편 최중기가 무안군수로 부임할 때 감동을 데리고 갔는데, 감동이 병이 생겨 서울로 올라왔다.
이 때 김여달이란 인물이 집으로 가는 감동을 순찰한다고 위협해 강간했던 일이
그녀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김여달은 대담하게도 남편이 없는 그녀의 집을 드나들면서 통정을 했고,
감동은 이미 버린 몸이라 생각하고 스스로를 창기(娼妓)라 칭하고 여러 남자들과 통정하였다고 한다.
(감동이 서울로 올라온 이유와 김여달에 의한 강간 시기, 간통한 자의 수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감동이 공식적으로 밝힌 남자들의 숫자는 39 명이었으며,
그 외에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들 대부분이 양반이었지만 수공업기술자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신분에 상관없이 애정행각을 벌인 것으로 보인다.
이들 중에는 총제 정효문, 상호군 이효량, 해주판관 오안로, 전 도사 이곡 등 고관들의 이름도 보였고,
사직, 부사직, 판관, 찰방, 현감 등의 벼슬도 보였다고 한다.
특히 정효문은 감동이 숙부 정탁의 첩이 되었을 때 통정을 하여
권격은 감동이 고모부 이효례와 관계가 있는 것을 알고도 통정을 하여 조선을 경악시켰다.
사헌부에서는 감동에게 교형, 정효문에게 참형에 처하게 하고
그외 관련자에게는 곤장과 자자(이마에 먹물로 죄를 새기는 것)을 청했지만,
감동은 최종적으로 관비로 변방으로 보내는 형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감동을 강간했던 김여달은 물론 나머지 사람들도 장형이나 파직 정도의 가벼운 처벌만이 내려졌다.
그 중에는 다시 벼슬에 오른 사람도 있다.
법에 의거하자면 사대부 집 출신의 여자와 간통을 한 남자들 역시 중벌에 처해져야 하는데,
이 시대에는 여자가 강간을 당했다 하더라도
그 후의 행실이 정숙하지 못할 때는 남자에게 죄를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감동을 강간·폭행·위협·공갈한 김여달에 대해서는 추후에 자주 극형 또는 중형을 청하는 일이 있었다.
혜원 신윤복의 춘화
김여달에게 강간당한 후 스스로 버린 몸이라 생각하고 창기로 살아갔던 감동에 비해
어우동은 스스로 억압에 저항하고, 오히려 남성을 지배했다는 점이 다르다.
정3품인 승무원 지사 박윤창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어우동은 자색이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종친인 정4품 태강수 이동과 혼인한 그녀는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 수 있었지만,
틀에 박힌 삶을 거부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기 시작한다.
대부분 양반과 정을 통한 감동과 달리 그녀는 신분을 가리지 않았다.
조선의 대표적 지배 이데올로기인 신분제와 성차별 따윈 가볍게 무시해주는 센스를 발휘한 것이다.
그녀가 남편 외에 처음으로 정을 통한 대상은 그릇을 만드는 천한 신분의 은장(銀匠)이었다.
"남편이 나가면 계집종의 옷을 입고 은장이 옆에 앉아서 그릇을 만드는 솜씨를 칭찬하다
내실로 끌어들여 마음껏 음탕한 짓을 하다가 남편이 들어오면 몰래 숨기곤 했다."라고 하니
참 대담하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애정행각은 곧 발각되었고 남편 이동은 어우동을 쫓아낸다.
어우동은 친정에 들어갔다가 집을 얻어 나간후 본격적으로 자유로운 생활을 만끽한다.
그 곳으로 수많은 남자를 끌어들였고 그들을 지배한다.
그 중 하나가 전남편 이동과 가까운 친척뻘인 방산수 이난이다.
아무리 처첩제도가 공인된 조선시대에도 친척의 아내를 취하는 것은 금기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난이 어우동과 관계를 가졌다는 것은
그녀가 그만큼 매력적이었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어우동이 이난을 좋아한 것은 "그가 젊고 호탕하며 시를 지을 줄 알기때문"이라고 하는데
그 시기 시를 좋아하는 사람은 대부분 시를 지을 줄 알았다는 점을 보면,
그녀도 시를 지을 줄 알았다고 볼 수 있으며, 이는 그녀가 육체이상의 매력을 지녔음을 뜻한다.
수산수 이기 또한 이동의 친척으로 그녀와 정을 통하기도 했으며,
이시애의 난을 정벌한 공로로 1등 공신에 책봉된 어유소, 전 의금부도사 김휘, 우부승지 노공필,
절충장군 김세적, 전 부평부사 김칭, 전 좌랑 정숙지 등 많은 벼슬아치들이 그녀와 정을 통했다.
이중 어유소는 조상을 모시는 사당에서 정을 통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예의의 나라 조선에서 감히 조상을 모시는 곳에서 간통이라니, 조선이 발칵 뒤집힐 만도 했다.
어우동의 애정행각이 어떻게 해서 발각되었는 지는 분명하게 알려져있지 않지만,
일단 한번 밝혀진 후 조선사회는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격론끝에 그녀는 성종 11년 10월 사형에 처해졌지만,
그녀와 정을 통한 남성들은 성종 13년 이난과 이기가 유배에서 풀려난 것을 마지막으로 모두 석방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어우동의 사형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현재 사형제 존치론자들이 주장하는 범죄예방효과로써의 사형제를
그시절 어우동의 사형을 주장했던 신하들이 그대로 얘기했다는 것이다.
세종시절 감동을 사형시키지 않아 어우동의 사건이 재발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과연 그랬을까?
어우동이 사형에 처한 후, 조선 후기에는 표면적으로 섹스스캔들이 감소했다.
허나 조선후기의 화가인 김홍도와 신윤복의 노골적인 춘화에서 알 수 있듯이,
그것은 그야말로 표면적인 감소가 아니었을까?
사형제 존치론의 범죄예방효과가 조선시대에도 이미 논의되었다고 하니,
그놈의 사형제 존치론... 참 지긋지긋하다.
게다가 그녀는 사형확정 당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사형확정 18시간만에 집행된 위대하신 박정희 정권의 인혁당 사건이 생각나는 것은 나뿐인가...